86세대는 학생운동을 통해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를 이뤄냈다는 집단적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일까. 시대의 희생양을 자처했으며, 때로는 정치·경제적 보상을 바랐다. 출신을 따지는 순혈주의는 포용보다 배타성으로 이어졌다. 이들이 제도권에 순응해 개혁성을 잃은 것은 필연적 수순으로 보였다.
취재팀은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86세대 가운데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서 자리 잡은 7명(정치권 3명, 기업 2명, 시민사회 2명)을 만나봤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기 세대의 정체성을 80년 광주항쟁에서 찾았고, "당시 시대 상황은 사회와 자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고 기득권·반민주에 저항한 문제의식은 이후 가치관과 지금 행동에까지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오영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열심히 공부해서 출세하겠다는 마음으로 법대에 진학했지만 80년 광주항쟁을 다룬 영상을 보고 광주의 진실과 군사독재, 폭력과 거짓, 민주주의와 남북통일에 대해 각성하게 됐다"며 "그때 우리 세대에는 그게 전부였다"고 소회했다.
반독재 민주화의 깃발 아래 모였던 86 동지들은, 그러나 90년대부터 길이 갈렸다. 민주주의의 정착, 동구권의 몰락, 북한의 현실, 신자유주의의 유입 등을 겪으며 극심한 몸살을 앓아야 했다.
하필 이 시기는 86세대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막 뛰어들기 시작하던 때였다. 당시 우리경제는 산업화와 3저로 인한 호황을 누리며 고속성장을 이어가고 있었고, 이는 86세대에게 경제적 수혜로 이어졌다. 계급투쟁과 남북분단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봤다면 이제 경제 주체로서의 현실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됐다.
울산에서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주도한 신지호 전 새누리당 의원이 <당신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를 발표하고 전향한 게 바로 이 무렵이다. 그는 "9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더 이상 기존 '자본주의 발달-계급모순 심화-혁명'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믿었던 신념(또는 이념)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어떤 이는 노동운동으로 투쟁을 이어갔고, 어떤 이는 재야·시민단체로 활동범위를 옮겼으며, 어떤 이는 정치권에 입문했지만, 다수는 평범한 직장인의 길을 걸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은 각 분야에서 우리사회를 이끌어가는 축으로 성장했다.
20대에 학생운동으로 5년간을 복역한 문용식 새정치민주연합 디지털소통위원장은 기업가로도 성공했으며, 경북대 출신으로 대구지역 학생운동을 주도한 서창원(가명)씨는 현재 잘 나가는 은행 지점장이다. 서씨는 "우리 중 일부는 징역을 살았고 아직까지 제대로 생계를 꾸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며 "그러나 우리 손으로 민주화를 쟁취했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김대중 정부에서 정치적으로 복권된 후부터는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공유하게 됐다"고 말했다.
사상 첫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전 대통령은 86세대를 대거 정치권에 입문시킨 장본인이었다. 물론 이전의 김영삼 전 대통령도 86세대의 정치권 통로로 작용했다. 특히 16대 총선에서의 낙천·낙선 바람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 치러진 17대 총선은 이들에게 당선 보증수표로 작동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86세대를 측근에 두며 애지중지했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130명 중 직간접적으로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관계된 의원은 20여명 남짓이다. 운동권 외에 80년대 학번까지 외연을 넓히면 그 수는 60여명까지 늘어난다. 새누리당에서는 원희룡 제주지사와 하태경 의원이 대표적인 86세대다.
하지만 86세대는 개혁을 바라는 국민의 기대를 저버렸다. 양극화 해소에 대한 해법을 내놓지 못했고, 다양해진 제 집단 간 갈등에 대해 무기력했으며, 사회의 소외된 아픔을 외면했다. 오히려 당내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기득권의 방패 역할도 자처했다. 그러면서 안팎에서는 "개혁보다 밥그릇에만 연연했다"는 조소까지 나왔다. 이들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했다.
오영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80년대의 진정성과 치열함, 절박함은 사라지고 기득권에 안주했으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라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며 "동시대의 다수와 더 교감하지 못했고, 고민한 만큼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도 서툴렀다"고 말했다.
같은 당 우상호 의원은 정당 현실에 매몰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인정했다. 그는 "여의도 정치권에 들어와 보니 당 안의 작은 블록 하나가 현실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고민을 하게 됐다"며 "치열하게 싸워 얻은 정치적 민주주의가 경제적 분배로 진행돼야 하는데 그렇게 못 나간 게 답답한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런 자조는 비단 정치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경제와 사회 영역에서도 같은 자성이 흘러나왔다. 전남대 재학 중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에서 활동하다가 전향, 현재는 재계를 대표하는 경제단체에서 일하는 조상훈(가명)씨는 "우리는 운동권 경험을 훈장처럼 여기며 '민주-반민주'의 대결구도와 민주주의를 쟁취한 주역이라는 특권의식·선민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은행 지점장인 서창원씨는 "기업이나 금융권만 봐도 2000년대를 전후로 운동권끼리 뭉쳐 다니고 투자금 모으러 다니는 풍토가 강했다"며 "재벌 중심의 혼탁한 기업 환경과 재벌 카르텔을 깨기는커녕 그걸 흉내내며 다니는 수준이었다. 86세대가 한 역할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