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원정기자] 미국 제 14대 연방대법원장을 지낸 얼 워렌(Earl Warren)은 ‘보수 성향’ 인사였다.
그를 대법원장에 지명한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당초 그 점을 염두에 뒀다.
앞서 둘은 195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선거에서 같은 공화당 후보로 겨뤘고, 워렌이 양보하는 대신 훗날 연방대법원에 자리를 하나 보전받기로 했다. 워렌은 1954년 그렇게 연방대법원장에 취임했다.
이후 16년 동안, 워렌은 연신 ‘진보적 판결’을 내려 세상을 놀라게 했다. 특히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를 위헌으로 판단한 ‘브라운 사건’은 흑백차별이 엄연했던 미국의 인권 문제를 크게 개선한 일로 평가 받는다.
피의자 인권을 보장한 ‘미란다 원칙’도 워렌이 이끈 연방대법원에서 확립됐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재임시 “가장 어리석은 결정”으로 연방대법원장 인사를 꼽았다.
박만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의 행보는 워렌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그는 공안검사 출신으로 지난 4월 방통심의위에 입성할 때부터 취임 반대 주장에 부딪쳤다.
방송과 통신의 심의를 담당하는 기구 수장으로서 공안검사 이력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언론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제기됐다.
출신성분을 문제 삼는 목소리는 연좌제에 근거를 두고 있는 만큼, 직에 대한 평가는 직을 대하는 태도를 놓고 논하는 게 합당할지 모른다. 그런데 박만 위원장의 행보는 애초의 우려가 기우는 아니었다는 심증을 굳히게 한다.
지난 27일 국정감사에서는 방통심의위가 사실상 정부의 검열기구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잇따라 나왔다.
방통심의위는 민간기구로 출범한지 3년을 넘겼지만 ‘차라리 폐지하라’는 비판에 맞닥뜨린 상황이기도 하다. 방통심의위 역할을 부정하는 쪽에서는 심의기준이 모호하고 ‘정치심의’가 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박만 위원장이 이끄는 2기 방통심의위는 이미 몇 차례 시험대에 올랐다. 지난 7월 유성기업 파업사태를 다룬 지상파라디오 3개 프로그램에 ‘공정성 위반’을 근거로 행정제재를 가했고, 최근엔 MBC <무한도전>의 ‘품위’를 문제 삼아 징계를 결정했다.
전자의 경우 출연자가 노조에 유리한 발언을 한 게 문제가 돼 심의 대상에 올랐다. 29일 <무한도전> 심의 과정에서는 “저급하다”, “수준이 낮다” 같은 발언들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지난 8월 박경신 고려대 교수를 둘러싸고 벌어진 한바탕 소동은 방통심의위가 안고 있는 논란의 일단일지 모른다.
박 교수는 당초 심의 기준이 얼마나 자의적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성기 사진과 그림을 블로그에 공개했다고 했지만, 그가 의도한 논의는 점화되지 않았고 사퇴를 압박하는 보수적 인사들의 목소리만 아우성쳤다. 이때 박만 위원장은 국회에 출석해 “검토하겠다”는 식으로 여권에 부합하는 대답만 내놓은 바 있다.
정부기구가 아닌 별도 민간기구가 방송 심의 역할을 맡은 까닭은 구시대적 검열에서 좀 더 진전된 심의를 당부하기 위해서다.
방송 심의 자체가 애초부터 가당치 않다는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전문수사기관인 검찰 보다 더 엄격한 제재는 수십 년 전 공안정국과 지금이 얼마나 다른지 회의에 빠져들게 한다. 박만 위원장의 향후 행보가 중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