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 금융권의 화두는 단연 생산적 금융입니다. 주요 금융그룹들은 올해 경영전략회의에서 기업금융과 첨단산업 지원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하며 금융의 역할을 성장과 혁신으로 확장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습니다.
KB금융, 신한금융, 우리금융, NH농협금융지주 등 주요 금융그룹들은 조직 개편과 전담 기구 신설까지 언급하며 실행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선언만 놓고 보면 금융권 전반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한 인상입니다.
다만 실제 수치는 다소 다른 흐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5대 은행의 기업대출 잔액은 지난해 하반기까지 증가세를 이어왔습니다. 그러나 12월 들어 잔액이 줄었고 올해 들어서도 증가 폭은 크지 않은 상황입니다. 생산적 금융 확대 기조가 본격화된 시점과 맞물려 나타난 변화라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기업금융을 강화하겠다는 금융권의 방향성과 달리 대출 지표는 숨 고르기에 들어간 모습입니다. 이는 단순히 은행의 전략 변화로만 보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기업대출 둔화의 배경으로는 은행의 조달비용 부담이 꼽힙니다. 최근 은행채 금리가 오르면서 은행이 자금을 조달하는 비용이 높아졌고 이는 곧 수익성 압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조달금리가 상승하면 순이자마진은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기업대출을 공격적으로 늘리기보다 속도를 조절하려는 유인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기업금융은 가계대출보다 경기와 산업 여건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영역입니다.
금융권이 말하는 생산적 금융은 담보나 과거 실적 중심에서 벗어나 기업의 성장성과 혁신성을 평가해 자금을 공급하겠다는 개념입니다. 중장기적으로는 금융의 역할을 확장하는 방향이지만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에는 부담이 적지 않습니다.
신용평가 방식의 변화와 리스크 관리 체계 개편이 필요하고 이는 곧 비용 증가와 불확실성으로 이어집니다. 글로벌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여전한 상황에서 은행들이 속도 조절에 나서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현재 나타나는 기업대출 정체는 금융권의 의지 부족이라기보다 금융 환경이 만든 제약에 가깝습니다. 고금리 기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기업들의 투자 수요 자체가 위축된 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과적으로 생산적 금융을 둘러싼 금융권의 방향성과 시장의 현실 사이에는 일정한 간극이 존재합니다. 이 간극이 해소되지 않는 한 생산적 금융은 속도보다는 방향에 머물 가능성이 큽니다.
생산적 금융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민간 금융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일부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정책금융과의 연계와 위험 분담 구조 마련 등 제도적 보완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숫자가 당장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정책 방향이 잘못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 인데요. 다만 현재의 기업대출 흐름은 생산적 금융이 구호를 넘어 실행으로 이어지기 위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연초 금융권이 강조한 생산적 금융은 분명한 방향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업대출 지표는 그 방향이 현실에서 구현되기까지 넘어야 할 장벽이 적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생산적 금융의 성패는 의지보다 환경에 달려 있는데요. 지금의 정체 국면은 그 환경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에 대한 숙제를 금융권과 정책 당국 모두에게 던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