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유지웅 기자] 한·미 통상 협상이 '통화스와프' 대신 '투자 구조' 협상으로 전환됐습니다. 양국은 3500억달러(약 500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금 집행 방식을 놓고 막판 조율에 들어갔으며, 쟁점은 '직접투자 비율'과 '투자처 선정 권한'에 모이고 있습니다. 대출·보증을 포함한 분할 투자가 이뤄지면 외환 유출 부담이 줄어, 통화 스와프가 없더라도 시장 불안은 일정 부분 완화됩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연 300억달러 상한에…'산은·수은 달러채'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20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자금 조달 방안과 관련해 "미 재무부의 외환안정화기금(ESF)으로는 그 규모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밝혔습니다.
미 재무부 자료에 따르면 ESF의 총자산은 2209억달러(8월 말 기준·약 313조원)지만, 즉시 사용할 수 있는 유동 자산은 약 293억달러(41조원)에 불과합니다. 전체 자산 대부분은 국제통화기금(IMF)이 위기 때 달러 유동성을 보완하기 위해 각국에 배분한 '국제 준비금'(SDR)으로 묶여 있습니다.
이 총재는 "외환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으면서 1년 안에 조달할 수 있는 외화 규모는 150억~200억달러(21조~28조원) 수준"이라고 재차 밝혔습니다. 한국에 남은 선택지는 대미 투자금을 단계적으로 나눠 조달하며 '연간 상한선'을 설정하는 것뿐입니다.
정부는 미국 측에 '연간 최대 3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펀드를 조성하겠다'는 방침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연간 100억달러의 추가 자금 조달이 필요한 만큼, 수출입은행·산업은행의 달러채 발행이 유력하게 점쳐집니다. 이미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수은·산은·한국무역보험공사의 대미 투자 관련 예산을 올해 1조9000억원으로 편성했습니다.
미 싱크탱크인 허드슨연구소에 따르면, 일본도 비슷한 방식으로 5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펀드 재원을 마련할 계획입니다. △일본 수출입은행(JBIC)의 달러 채권 발행 △일본정부가 엔화로 JBIC에 대출 제공 △일본의 외환보유액 일부 활용 등입니다.
일각에서는 원화와 달러를 섞어 투자금을 조성하는 방안도 거론됩니다. 대미 투자를 원화로 진행할 경우, 대규모 달러 유출로 인한 환율 급등이나 외환시장 불안 가능성을 줄일 수 있어, 미국이 요구해온 '전액 달러화 투자' 방식보다 유리하다는 평가입니다.
관세 협상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했던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20일 영종도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을 통해 귀국하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남은 과제는 '현금 부담'과 '형평성 리스크'
앞서 우리 정부는 미 연방준비제도(연준)와의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협상 타결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연준이 트럼프 행정부와 별도로 운영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요구는 실제 체결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한국의 '지급 여력 한계'를 부각하기 위한 협상 전략 차원의 '카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미국 현지 협상에서는 '분할 투자' 방식에 대한 이견이 좁혀지면서, 통화스와프가 주요 의제로 다뤄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지난 16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기자들과 만나 "투자 운용 구조·방식이 확정되면 그에 따라 외환 소요가 결정된다"며 "이 변동에 따라 통화스와프를 해야 할지, 한다면 어느 규모가 현실적인지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금 투자 비율이 어느 정도냐'도 관건입니다. 애초 정부는 현금 투자 비율을 5%로 설정했지만, 미국 측이 '전액 현금' 투자를 요구하면서 일정 수준의 양보는 불가피할 전망입니다. 현금 비중이 높을수록 단기간에 유출될 수 있는 달러 규모가 커지지만, 대출·보증 등 간접투자 방식은 자금이 바로 집행되지 않아 외환시장에 미치는 단기 충격이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다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 발언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입니다. 특히 '일본과의 형평성' 문제가 가장 큰 리스크입니다. 일본은 미국과의 양해각서(MOU)에 따라, 미국이 투자 대상을 통보하면 뒤 45일 안에 현금을 송금해야 하는 구조를 수용했습니다.
투자 수익은 미국이 90%, 일본이 10%를 가져가며, 투자처 결정권도 미국이 전적으로 쥐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은 반도체·배터리 등 우리 산업 경쟁력과 직결된 분야에 투자함으로써, 대규모 자금이 단순한 해외 이전에 그치지 않고 기업의 성장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을 고려하면, 막판 압박 끝에 "내가 양보했다"는 정치적 포장으로 타결을 선언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유지웅 기자 wisema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