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유지웅 기자] 한·미 통상협상이 '수정안에 재수정안'까지 오가며 7부 능선을 넘긴 가운데, 막판 조율을 놓고 긴박한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과 회담을 마친 직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을 언급하며 "수천억, 수조 달러를 내야 한다"고 압박 수위를 한층 높였습니다. 이달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최종 합의문 도출을 위해 후속 협의가 이어질 전망입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강경한 트럼프…"선불" 이어 "한국이 수천억불 줘야"
19일 <뉴스토마토> 취재를 종합하면, 이 같은 트럼프 대통령 발언은 김정관·러트닉 장관의 회담 다음 날 나왔습니다. 협상 결과를 보고받은 후, 직접 입장을 밝힌 것으로 풀이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17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우리는 더 이상 어리석지 않다"며 "중국으로부터 아주 심하게 이용당해 왔고, 미국을 이용해온 국가에는 유럽연합(EU)·일본·한국도 포함된다"고 했습니다.
이어 "우리가 바라는 건 공정한 대우"라며 "'공정하다'는 것은 미국으로 수천억, 조 단위 달러가 들어온다는 의미"라고 강조했습니다. "한국이 대미 투자금 3500억달러(약 500조원)를 선불 지급하기로 했다"고 거듭 주장한 지 이틀 만입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김정관 산업부 장관,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 등 우리 정부 고위급이 워싱턴DC에서 총력 협상을 벌이는 가운데 나온 발언입니다. 협상의 핵심 쟁점인 '직접투자 비율'과 '지급 방식'을 동시에 겨냥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한·미 양국은 지난달 초부터 대미 투자금 운용 방식과 관련해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전액 현금 직접투자 방식으로 운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고, 한국도 "전액 직접투자는 불가능하다"며 맞서고 있습니다.
관건은 정부가 필요조건으로 내건 '외환시장 안전장치'입니다. 한국은 '최대 10년 분할 투자 방식'과 미 재무부가 외환안정기금(ESF)을 통해 원화를 매입하는 '한국은행·미 재무부 간 통화스와프'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이 처음 요청했던 '무제한 한·미 통화스와프'는 트럼프 행정부와는 별도로 운영되는 연방준비제도(연준)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 우회한 결과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8월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미소짓고 있다. (사진=미 백악관)
"일본 꼴 날라"…'투자 관여·수익 배분' 중요한 이유
미국은 한국에 일본과 마찬가지로 특수목적법인(SPV)을 설립하고, 미국이 투자처를 정하면 한국이 일정 기간 내 현금으로 투자금을 지급하는 방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 정부는 '대미 투자 펀드 관련 양해각서(MOU) 수정안'을 미국 측에 보냈습니다.
수정안에는 △직접투자 비율 조정 △'상업적 합리성' 차원에서의 투자처 선정 관여권 보장 등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투자처 선정에 대한 관여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대출·보증 등 간접투자 비율을 높이더라도 '고위험 투자'로 인해 원금을 잃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미국 재정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위험 프로젝트에 이 자금이 매력적인 '투입 재원'이 될 수 있습니다.
프로젝트 수익금 배분 방식도 문제입니다. 실제 앞서 일본이 미국과 체결한 5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양해각서(MOU)에 따르면, 원금 회수 후 수익의 약 90%는 미국이, 10%를 일본이 갖는다는 점이 명시돼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투자가 실패해도 미국 정부는 법적·재정적 책임을 지지 않고(17조) △일본은 투자처 선정권이나 담보권 등 투자자·채권자로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합니다(11조·17조). △또 일본이 투자를 거부하면 관세 인상과 수익률 하락이라는 이중 페널티가 작동하도록 설계돼 있습니다(8조).
이와 관련해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15일(한국시간) 공개된 유튜브 채널 '삼프로TV' 인터뷰에서 "최근 2주 사이 미국이 우리가 보낸 수정안에 대해 상당히 의미 있는 반응을 보였다"며 "한동안 별다른 반응이 없었는데, 이달 초 김정관 산업부 장관이 방미했을 때 미국 쪽에서 의미 있는 코멘트를 했다"고 소개했습니다.
'굿캅 배드캅' 전술…'트럼프식 협상법' 또 등장
현시점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스콧 베트 미 재무부 장관과 트럼프 대통령 사이 메시지가 엇갈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는 16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과의 회동 후, 기자들과 만나 미 측이 '3500억달러 선불' 요구를 철회할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베선트 장관이 한국 외환시장의 안정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는 취지였습니다. 러트닉 상무장관에게도 "긍정적 답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설득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며 미국의 공식 입장은 현재까지 '3500억달러 조기 선납'이라고 했습니다.
앞서 베선트 장관은 "내가 연준 의장이었다면 한국은 이미 통화 스와프를 가졌다"며 "향후 10일 내 결과가 나올 것"이라며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관세협상의 실질적 '키맨'(핵심 인물)과 '최종 결정권자'인 트럼프 대통령이 엇박자를 내고 있는 셈인데, 이를 두고 타결이 임박한 시점에 한국의 양보를 최대한 끌어내기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과거에도 같은 패턴이 반복됐습니다. 트럼프 1기 당시인 2019년 미·중 1단계 무역합의 직전에도 재무라인이 "합의 임박" 신호를 흘린 뒤,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합의 없으면 관세 부과"를 경고하며 중국의 양보를 끌어냈습니다.
유지웅 기자 wisema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