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오늘도 우리는 '아직도'를 듣는다. 여러 미성의 목소리들을 투과해 고운 벨벳처럼 흐르는. 낙엽과 공기, 유리잔 사이로 자기 만의 노스탤지어가 유독 짙게 번져서.
TV에서 늘 흘러나오는 모던 록밴드 넬의 대표곡 '기억을 걷는 시간(기걷시)'에 관한 제 소견입니다. 2008년 3월 21일 넬의 정규 4집(통산 6집) 앨범 'Separation Anxiety(세퍼레이션 앵자이어티·분리불안 장애를 일컫는 심리·의학적 용어)' 타이틀곡.
인피니트 성규, 소녀시대 태연, 블랙핑크 로제, 워너원 황민현, 뉴진스 해린…. 당대 최고 기량이라 꼽을 만한 보컬 가수들이 이 노래를 택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최고음까지 가성으로 올려야 하는 후렴구 난이도 뿐 아니라, 선율과 화성의 아름다운 미학 때문일 것입니다. 사 단조(G minor)의 조성으로 시와 미에 ♭이 붙어 있고, E♭, F(sus7), Gm, B♭ 네 종류의 머니코드(돈을 벌어다주는 코드라고 흔히 불림). 딱히 복잡한 조바꿈이 없어 피아노와 기타로 손쉽게 연주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힙니다.
18일 본보 기자와 서면으로 만난 넬 멤버들, 김종완(보컬)·이정훈(베이스)·이재경(기타)은 "16년 전 이 곡을 작업할 당시 ‘좋은 노래’라 확신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많은 분들께 사랑받을 줄 몰랐다"며 "일단 노래를 잘 하는 동료 뮤지션들이 곡을 다시 불러주는 것에 대해 굉장히 기쁘고 고맙게 생각한다. 그들에 의해 재해석 되는 기억을 걷는 시간을 들을 때 우리도 신선하고 늘 새로움을 느끼고 있다"고 했습니다.
본보 기자와 서면으로 만난 넬 멤버들, 김종완(보컬)·이정훈(베이스)·이재경(기타). 사진=스페이스보헤미안
'기억을 걷는 시간(기걷시)'이 수록된 이들의 음반 'Separation Anxiety'는 서태지컴퍼니 시절부터 작업해온 'Healing Process'와 함께 음악의 치유 기능으로써의 의미를 되새겨준 작품. 상실감에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이 전체적인 서사의 뼈대입니다.
"그때 당시 나이가 20대 중반의 나이였어요. 누구나 그 시기(나이)쯤에는 심적인 혼란과 방황을 겪는데, 우리도 남들과 다르지 않은 같은 시기를 보냈거든요. 자연스럽게 음악(음반)으로 감정들을 표현하다 보니 그러한 앨범 타이틀이 필요했고, 그 당시에 가장 어울리는 것이라고 생각됐던 것으로 앨범명을 정하게 됐어요."(김종완)
이 때의 앨범은 신스, 시퀀스 사운드와 현(絃) 편곡이 록의 편제와 적절한 배합을 찾아가는 단계라는 점에선 이들의 초기작과 결을 달리 합니다. 일렉트로니카 곡('Fisheye Lens')도 있고, 현(絃)과 드럼을 짧은 프레이즈를 반복하는 피아노에 얹은 8분41초짜리 대곡('12 seconds')도 있습니다. 다만, 영국 록 밴드 오아시스 'Wonderwall'이 연상되는 'Promise Me'나 '1:03' 같은 기타 스트로크들이 두드러지는 곡도 있습니다. "'전체적인 사운드'를 통일성 있게 했다기보다는 (하나의) 앨범을 들었을 때 각 곡들이 유기적으로 상호 보완작용할 수 있도록 노력을 했었어요. 그러하다 보니 듣는 분들이 통일성이 있다고 느끼시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김종완)
18일 본보 기자와 서면으로 만난 넬 멤버들, 김종완(보컬)·이정훈(베이스)·이재경(기타). 사진=스페이스보헤미안
'기억을 걷는 시간'은 이 앨범이 이야기하는 '분리불안'이라는 큰 틀 아래서 그리움이라는 주제를 나타내는 곡입니다. 낙엽과 공기, 유리잔 같은 일상의 흔한 소재들에 그리움의 대상을 투영시킨 음유시적인, 슬픈 가사가 오히려 담담한 멜로디와 결합하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록 밴드 곡임에도 일렉기타 멜로디가 들어가지 않는 점도 특징입니다.(라이브 때는 키보드 파트로 대체) 원곡자의 입장에선 이 곡이 대중들에게 소구한 이유를 무엇으로 보고 있을까.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으면 하는 감정들을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가사로 표현을 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미 그때(그 시절)부터 장르의 특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단지 곡이 잘 표현되는 편곡이 가장 좋은 편곡이라고 생각했어요. ‘기억을 걷는 시간’은 지금의 (음반에 실리) 편곡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편곡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김종완)
18일 본보 기자와 서면으로 만난 넬 멤버들, 김종완(보컬)·이정훈(베이스)·이재경(기타). 사진=스페이스보헤미안
2분짜리 곡이 넘실대는 오늘날 이 곡의 길이는 5분12초 정도로 깁니다. 당시 소속사에서도 곡 길이를 줄이자고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넬은 원곡 그대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기걷시'는 넬의 이후 사운드나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이라든지, 넬이라는 팀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쳤을까. "지금의 사운드에는 영향을 끼친 건 없고 그 앨범 작업 당시 드라이한 사운드를 추구했어요. 넬의 사운드는 그때그때마다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따라서 늘 변화하고 표현하고자 하기 때문에 팀의 정체성이라던가 지금과는 상관이 없어요."(김종완)
최근 아이유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팔레트'에 넬을 초청해 이 곡을 함께 부르는 무대를 꾸미기도 했습니다. “같이 한 곡을 짧게라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라는 의견을 주고 받았고, 넬 측은 "아이유의 음색을 평소 좋아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함께 부르게 됐다"며 "평소보다 곡을 심플한 구성으로 한 편인데 둘의 목소리가 잘 대조되면서도 잘 어우러지는 것 같아 기분 좋은 협업이었다"고 돌아봤습니다.
보컬 김종완은 평소 음악에도 인격이 있다고 줄곧 말해오곤 했습니다. 아이로 따지면 이 곡도 벌써 중학교를 졸업할 나이 쯤이라는 사실. 16살인 '기걷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마지막으로 있을지 묻자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잘 자라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나길 바란다."
최근 아이유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팔레트'에 넬을 초청해 이 곡을 함께 부르는 무대를 꾸미기도 했다. 사진=유튜브 캡처
8월 18~20일부터 시작돼 25~27일까지 서울 노들섬에서 이어지는 넬의 단독 콘서트 'NELL CLUB CONCERT 2023 'Burn''에서 16살의 '기걷시'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