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은 최치원 선생에 대해서 한 번 더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최치원 선생은 지난 시간에 제가 우리 공동체의 ‘최초의 유학자’ 가운데 한 분이다,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만 최치원 선생은 유학자로만 평가하기에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왜냐하면 이분은 유학만 공부한 것이 아니라, 도학과 불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고, 많은 연구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앞선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난랑비서(鸞郞碑序)>라는 글을 남겨서 우리 공동체의 고유한 풍류도(風流道)가 있었음을 최초로 기록에 남겨 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난랑비서>는 우리나라에 고유한 풍류도가 있었는데, 풍류도는 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가르침 세 가지 가르침을 포섭하고 있었다, 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최치원을 ‘선비 신선’이라고 묘사한 조선시대 풍기군수 주세붕. 사진=필자 제공
<난랑비서>는 굉장히 중요한 문헌이지요. 최치원 선생은 그 자신 또한 유학 가르침의 테두리에 한정시켜놓을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치원 선생에 대해서 조선 시대에 풍기 군수를 지낸 주세봉이라는 사람은 백운동서원을 만든 주세붕은 최치원 선생을 평가하면서, ‘유선(儒仙)’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유선이 뭐냐, 유학의 선비 ‘유(儒)’자에다가 신선 ‘선(仙)’자입니다. “선비 신선”이라는 뜻이지요. 그가 판단할 때도. 유학자라고만 판단하기는 힘드니까, ‘신선’이라는 말은 유학자들이 극력 배척했던 개념입니다. ‘선비 신선’이라는 개념은 “동그란 네모”, 라든가 “각진 동그라미” 같은 형용 모순에 해당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찬 보살님”이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유선(儒仙)”이라고 불릴 정도로 최치원 선생은 유학의 테두리에만 가둬두기가 굉장히 어려운 분이었습니다.
최치원 선생은 당나라 유학 시절에도 유학만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신선술을 전수 받았다는 기록이 <구화수제도소(求化修諸道疏)>라는 글에 남아있습니다. 이 분이 유학만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 신선술까지 전수받은 사람입니다.
최치원 선생의 위패를 모신 충남 서산의 부성사에 소장돼 있는 최치원의 초상. 사진=필자 제공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을 스물여덟 살에 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는데요. 스물여덟 살에 신라로 귀국한 뒤에 굉장히 많은 불상과 이 땅의 고승들에 대한 발문과 비문을 굉장히 많이 남깁니다. (그가) 이런 작업을 했다는 것을, 그의 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른 살 때부터. 서른 살이라면, 귀국한 지 이년이 지나서죠. 귀국한 지 2년이 지나서 시작했는데 70살에 이르기까지 늙어 죽을 때까지 꾸준히 새로 만들어진 불상과 고승들에 대한 발문과 비문(碑文)을 꾸준히 지었습니다. 이 말은 이분이 불학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관심이 없다면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겠죠. 또 최치원이 불학에 대해서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라면, 이런 발문이나 비문을 불교계에서 의뢰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그가) 마흔여덟 살에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이라는 문장은 불교계의 의뢰를 받아서 지은 글이 아니라 그 스스로 관심사였던 내용을 문장으로 정리한 글입니다. 법장(法藏) 화상이라는 분은 당나라에서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고 불릴 수 있었던 스님인데, 당대 최고의 스님이었던 최치원이 법장의 사상을 상세히 몰랐다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지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최치원이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은 “대정 신수 대장경”에 들어가 있습니다. 대장경에 들어가는 글을 (유학자인) 선비가 지은 겁니다. 그 말은 (기독교의) 신학대학 다니는 사람이 (불교의) 대장경에 들어가는 글을 지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난리가 나겠죠.
최치원이 사상전기를 쓴 중국 화엄종 3대 조사로 받들여지는 당대 최고의 지성 법장 스님의 초상. 사진=필자 제공
최치원의 글은 대장경에 들어가 있습니다.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은 법장(法藏)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인용하는 글입니다. 대장경에 글을 남긴 우리 공동체의 지식인은 두 명밖에 없습니다. 한 명은 원효이고, 또 한 명은 최치원이에요. 원효 스님이 남긴 《금강삼매경론》이라든가 많은 저작들은 다 대장경에 포함돼 있지만, 유학자이면서 (유학자 가운데) 대장경에 들어갈 수 있는 글을 남긴 사람은 최치원이 유일합니다. 유학사 이천년 역사에서 한·중·일을 통틀어서 대장경에 들어갈 수 있는 글을 남긴 사람은 최치원이 유일합니다.
이럴 정도로 최치원은 유학에만 정통했던 사람이 아니라, 유학자라고(만) 평가하기에는 아까운 사람이죠. 유학이라든가 도학이라든가 불학이라든가 이런 개념 구별에 개념치 않았던 유불도의 통섭과 통합에 더 관심이 많았던 그런 풍류도적인 지식인이었다라고 평가하는 게 온당할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가 그런 성향을 지녔음을 알 게 해주는 증거가 그가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시절에도 남아 있습니다. 그가 (당의) 과거에 급제해서 당나라에서 벼슬을 할 때, 올린 상소가 두 건이 남아 있습니다. 두 건이 남아서 그의 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에 실려 있습니다. 그 두 건의 상소가 뭐냐면은, 한 건은 (어느) 불교의 사찰[양주(揚州)에 있는 대운사(大雲寺)라는 절]이 낡아서 무너졌으니까, 중수(重修)가 필요해 보시를 해야 된다는 상소문이고, (다른) 하나는 도관(道觀)들이 무너져서 도관을 중수해야 된다는 보시가 필요하다는 상소입니다. ‘도관(道觀)’이 뭐냐면은, 도교에도 불교의 사찰처럼 도사들이 머무는 절집이 있는데, 교회라고 할 수 있죠. 도교의 교회가 ‘도관(道觀)’입니다.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벼슬하던 시절에 (그가 당나라 황제에게 올린) 상소가 두 건이 남아 있는데, 두 건이다, 한 건은 불교에 관한 거고, (다른) 한 건은 도교에 관한 겁니다. 유학자라는 사람이 (당나라) 황제한테 올린 글이 두 건이 남아 있는데, 한 건은 사찰의 중건이 필요하다는 상소이고, 다른 한 건은 도관(道觀)의 보수가 필요하다는 상소입니다. 이 정도 되면 요즘 시쳇말로 대단한 오지랖이다 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거죠. 최치원의 행적을 현대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기독교의) 신학대학생이 신과대 다니는 사람이 절을 잘 지어야 된다라는 상소를 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이럴 정도로 최치원은 유교라는 테두리에 가둬놓기에는 (너무) 큰 인물이었죠. 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구별에 크게 개념치 않고, 이것(들)을 통섭하고 통합하려 한 지식인이었다. 이렇게 평가하는 게 맞을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에 은거한 모습은 조정의 시비에 염증을 느끼면서 가야산(伽倻山)에 독서당(讀書堂)을 짓고 은거한 모습은 도인(道人)적인 모습이지요.
도인(道人)이라고 할 수 있지요. 최치원이 추구했던 바는 유불도의 구별이 아니라 유불도의 구별 속에 안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유불도라는 것이 진리를 담고 있다면 하나로 통합될 수 있고 하나로 통합되고 하나로 통섭해야 된다라는 것이 최치원의 믿음이자, 신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런 신조는, 그가 남긴 개인 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계원필경》은 우리나라에서 전해져오는 2만 건에 이르는 개인 문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과 유교의 가르침은 원래 통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통한다는 것을 몰라서 겸해서 받아들이지 못한다“ 라는 주장을 담고 있는 하동 쌍계사의 진감선사탑비. 사진=필자 제공
가장 오래된 《계원필경》에는 중요한 글이 실려 있는데, 하동 쌍계사에 남아 있는 진감선사탑비에 세긴 <진감화상비명병서(眞監和尙碑銘竝序)]>라는 글에서는 “불교의 가르침과 유교의 가르침은 원래 통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통한다는 것을 몰라서 겸해서 받아들이지 못한다“ 라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최치원 선생은 유교의 가르침에만 갇혀 있을려고 한 것이 아니라, 불교와 도교까지 통합해서 세 가지 가르침을 통합해서 융합하려고 한 풍류도적인 지식인이었다 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또 《계원필경》에 보면 문경 봉암사에 남아 있는 지증대사탑비에 세긴 <지증화상비명병서(智證和尙碑銘竝序)]>라는 글도 있는데, <지증화상비명병서>라는 글에서도 최치원은 “유교의 가르침과 불교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다, 통한다, 근본에서는 통한다“라고 주장한 뒤에, “유교에서 얘기하는 ‘어질다[인(仁)]’는 것은 부처요, 부처의 눈은 바로 어질다는 것이다, 그것은 법칙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말은 유교의 가르침의 핵심이 어질다는 것이죠. 어질게 살아야 된다, 라는 유교의 가르침과 불교의 가르침은 근본에서 통한다. 라는 사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교의 가르침과 불교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다, 근본에서는 통한다”고 설파한 문경 봉암사 경내에 남아있는 지증대사탑. 사진=필자 제공
최치원에 대해서 오늘 두 번째 말씀을 드렸는데요, 제가 지난 시간에는 이 땅의 최초의 유학자들이 강수, 설총, 최치원 같은 분들이다 라고 말씀드렸는데, 최치원은 유학자라고만 범주를 정하기는 너무 큰 인물이기 때문에, 최치원은 유학과 불학과 도교의 가르침을 통섭하려고 한, 통섭적 지식인이자, 풍류도를 실천하려고, 한 풍류도의 지식인이다 라고 평가하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최치원은 불학과 도교와 유학의 가르침을 통합하려고 했고 융섭하려고 한, 풍류도의 전형적인 지식인이었다 라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최치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최치원 고향인 전북 옥구의 문창서원. 사진=필자 제공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