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나라에서 유학 전래 초기의 최초의 유학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할 수 있는 강수(强首)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강수는, 《삼국사기》에 <강수(强首)열전>이 남아있습니다. <강수열전>에서, 자세한 기록을 볼 수 있는 데요. 강수는, 기록에 따르면 어릴 때 태어나서 배우지도 않고도 글을 읽었다고 합니다.
강수가 글을 읽자, 강수의 부모들은 깜짝 놀랍니다. 이 땅의 부모들은 전부 다 똑같은 걱정을 갖고 계십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이실 겁니다. “우리 자식이 천재 아니야?”, “우리 자식이 영재 아니야?” 라는 공통의 걱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범재입니다. 모든 아이들이 그 정도의 지적능력은 지니고 태어납니다.
강수의 부모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글을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강수가 글을 읽자, 깜짝 놀란 강수 아버지가 강수에게 묻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공동체 어버이들의 병폐가 다 드러납니다. 아버지가 강수에게 요즘 부모들이라면 “너 대학 어디 갈래?” 이렇게 묻는 거겠죠. “너 무슨 과 갈거야?” 이런 식으로 문득 강수에게 “너 뭐 공부할래? 유교 할거야, 불교 할거야?“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강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듣기에 불교는 세외(世外)의 가르침이라고 들었습니다. 세속 바깥에 가르침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인간세상에서 사람들과 사는 사람으로서, 세외의 가르침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저는 유학을 배우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강수 아버지는 “너 좋을대로 해라” 라고 대답했습니다.
권오창 화백이 그린 강수 표준영정. 충주박물관 소장. 사진=필자제공
그래서 유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강수가 벼슬길에 나설 즈음 됐을 때, 강수의 아버지가 우리 공동체 부모의 폐단 두 번째 폐단을 드러냅니다.
두 번째 폐단은 뭐냐, 혼인에 간섭하는 갑니다. “너 사귀는 여자있냐?” 이러면서 “너 어떤 여자 사귀냐?” 어떤 여자랑 결혼할래? 가문 좋고 조건 좋은 여자랑 결혼하면 좋잖아?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자 강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강수가 커밍아웃을 합니다. “저는 대장간 집 딸하고 야합(野合)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솔직히 털어놨습니다. 강수의 아버지는 이렇게 얘기하자, 대장간 집 딸이라고 하니 신분이 높을 리는 없고 하층민일 가능성이 높겠죠. 최하층에 가까운 신분의 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강수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들의 공통된 폐단이죠. “신분이 미천한 여자랑 결혼하면, 네가 앞으로 벼슬을 하면은 나라 사람들이 너를 다 알 텐데 배우자가 신분이 미천한 사람이면, 네가 부끄럽지 않겠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조건 좋은 여자랑 혼인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이렇게 얘기하자,
강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먼저 일어나서 아버지에게 절을 두 번 합니다. 좋은 전략이죠. 아버지 등 어르신네의 말을 반박할 때는 절을 하는 거 참 좋은 전략입니다. 그냥 아버지 말을 따를 때는 절할 필요 없어요. 아버지 말에 반박할 때는 강수가 절을 두 번 합니다. 절을 두 번한 뒤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집이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도(道)를 배우고도, 도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진정으로 부끄러워해야 일입니다.“ 강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듣기에 ‘조강지처(糟糠之妻)는 불하당(不下堂)이라고 했고, 빈천지교(貧賤之交)는 불가망(不可忘)‘이라고 했습니다. 쌀찌꺼미 같은 나쁜 음식을 같이 먹은 아내는 배반할 수 없고, 가난하고 천할 때 사귀었던 친구는 잊을 수가 없다.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강수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조건이 좋은 여자랑 혼담을 중단하라고 얘기합니다.
이야기합니다. 이 대목에서 나오는 ‘야합(野合)’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드리고 넘어가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야합(野合)’이라는 표현은 본래 “들판에서 한다”는 얘긴데요, 굉장히 야한 표현이죠. 이란 표현은 사마천의 《사기》에서 공자(孔子)의 아버지인 숙량흘이 안씨 여자와 야합(野合)해서, 공자를 낳았다, 라는 표현에서 ‘야합(野合)’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정식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남녀 간의 사귐을 야합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강수에게 야합이란 표현을 쓴 것은 삼국시대에 강수를 공자에 빗대 보려는 시각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강수라는 사람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자는 이름이 ‘구(丘)’입니다. 언덕 ‘구(丘)’자예요. 왜 이름이 언덕이냐? 니구산(尼丘山) 근처에서 태어났기 때문인지 니구산의 정기를 받은 때문인지 아이를 낳고 보니 공자는 머리가 앞으로도 튀어나오고, 뒤로도 튀어나온 짱구였습니다. 니구산처럼. 이렇게 짱구이어서 ‘언덕’이라는 시적인 매우 낭만적인 이름을 갖게 된 것이지요.
강수의 이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강수란 아이가 태어났는 데 머리에 소뿔이 난 것처럼 머리가 강했다고 해요. 그래서 ‘강할 강(强)’자, ‘머리 수(首)’자 머리가 강한 아이, 강수(强首)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강수에게 ‘야합’이라는 표현을 쓴다든가, 강수의 이름이 공자의 언덕이라는 이름처음 시적인 강수, 짱구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삼국시대에 이미 강수를 공자에 빗대어 보겠다는 당시 사람들의 시각이 있었음을 우리가 읽어 낼 수 있습니다.
강수는 신라의 육대(六大) 문장가 중에 한 사람으로 꼽히는 사람입니다. 강수는 벼슬길에 나아가서, 당시에 중국에서 조서(詔書, 외교문서)가 왔는데, 조서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강수가 이거를 제대로 읽어내어서, 당나라의 편지에 답장을 외교문서로 써서 중국사람들이 보더라도 못지않은 한문 실력으로 외교문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래서 신라가 위기를 넘기고 당나라의 도움을 받아서 고구려와 백제와의 경쟁에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 최종 승리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훗날에, 신문대왕이 강수의 공을 평하면서 이렇게 평했습니다. “강수는 외교문서를 작성해서 당나라와 고구려와 백제와 우리가 의사소통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이렇게 평가한 뒤에 “신라가 선대의 왕들이 고구려와 백제의 전역(戰役)에서 승리한 것은 무력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그 배후에는 강수처럼 외교문서의 작성에 능통함으로써,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도록 한 공로를 잊지 못할 것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강수가 외교문서 제대로 작성하고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공으로 당나라와 고구려와 백제와의 의사소통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 있었다는 평이죠. 정확한 평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수가 죽자 강수에게는, 강수가 살아 있을 때는 연봉으로 200섬을 받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200섬이면 연봉이 굉장히 높은, 고위직 공무원이었죠. 강수가 죽은 뒤에 강수의 장례비용을 국가에서 전부 부담했으며, 나라에서 강수의 아내에게 물품을 많이 하사했습니다. 강수의 아내는, 앞에 나왔었던 대장간 집 딸이죠. 그 딸래미는 나라에서 나오는 물품을 한 푼도 사사로이 쓰지 아니하고 강수의 장례 비용을 치른 뒤에 나머지는 불교의 사찰에 전액을 보시했습니다. 그러고는 어렵게 살았습니다. 살기가 어려워서 강수의 아내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문무대신들이 상소를 해서 강수같이 중요한 인재의 아내가 살기 힘드니, 나라에서 곡식을 더 내려주심이 어떻겠습니까 라는 상소(上訴)를 (임금에게) 올릴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강수의 아내는 이걸 받지 않겠다고 끝까지 거부하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강수의 아내 또한 강직한 성품을 지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수가 사람 보는 눈도 있었다 라고 볼 수 있죠.
강수의 고향인 충주 호암체육관 앞에 세워져 있는 강수선생상. 사진=필자 제공
강수는 우리 공동체의 최초의 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데, 최초의 유학자들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릴 텐데요 최초의 유학자는 강수, 설총, 최치원 같은 인물들입니다. 이 분들이 받아들였던 유학은, 조선시대의 유학이 관학(官學)이 되어서, 배타적이고 교조적이였던 송명유학(宋明儒學)이 아니라, 한당유학(漢唐儒學)이었습니다.
한당유학은 주공(周公)과 공자를 섬기는 유학으로서, 유학 이외에 도가(道家)라든가 다른 사상에 대해서도 관용적인 그런 유학이었습니다. 한당유학 때 나왔던 형병(刑柄)의 《논어의소(論語義疏)》를 보면 공자의 말씀과 노자의 말씀이 근본적인 데서는 서로 통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최초의 유학자들로 꼽히는 강수, 설총, 최치원 같은 분들은 후대의 조선시대의 꽉 막힌 유학자들과는 달랐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강수가 남긴 말,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도(道)를 제대로 배우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진정으로 부끄러워해야 될 일이다.“ 라는 말씀은 어떤 유학자들 보다도 중요한 얘기를 남기고 간 것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강수 같이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유학사에서는 유학을 바로잡고 보안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등장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저는 주장합니다.
오늘은 강수의 말씀을 전해 드렸습니다. “집안이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것이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라 도(道)를 배우고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워 할 일이다.“ 라는 강수의 이 말은 유교의 일방통행적 윤리보다도 진일보한 사상을 제시한 얘기다 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유학의 남성중심주의와, 가부장 중심주의에 편승해서 쓱 조건 좋은 여자한테 옮겨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장장이의 딸이라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미천한 신분의 여성과 의리를 지키려 한 강수는 “유교의 일방통행적 윤리를 쌍방향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던 해석의 힘에서 나왔다“라고 말씀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강수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