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크게 작게 작게
페이스북 트윗터
(이상수의 한국철학사 17화)원효의 야단법석(野壇法席)
민중들 속에서 대승불교를 완성하다
입력 : 2023-07-10 오전 6:00:00
《삼국사기》에는 원효 열전이 없습니다. 삼국시대를 통틀어서 최고 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원효의 열전이 없다는 것은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 자신의 안목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음을 드러낸 대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호의 일생을 읽으려면 《삼국사기》 대신 《삼국유사》를 보아야 합니다.《삼국유사》에 따르면, 원효는 계율을 잃고[실계(失戒)] 설총을 낳은 이후 세속 사람들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불렀습니다. ‘소성거사’라는 말은, 큰 가문이 아니라 “한미한 집안의 보잘 것 없는 사내”라는 뜻입니다.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당나라 유학의 길을 접고 돌아온 그이가 스스로를 보잘 것 없는 중생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어떤 깨달음을 얻어 높은 경지에 이른 도인이나 법사의 대우를 받으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음을 보여줌니다. 오늘날 작은 절간의 지주만 되어도 거들먹거리며 고급 승용차 타고 다니는 납자들은 원효의 철저한 보살행의 실천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껴야 마땅합니다.
 
원효 스님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는 경산시 자인면 북사리의 제석사에 있는 ‘원효성사전’ 내부에 그려져 있는 원효 스님의 일생을 묘사한 팔상도 가운데 원효 스님이 민중들 속에서 무애춤을 추는 모습.
 
설총을 낳은 이후 원효의 삶에 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계속 읽어보기로 하죠.
 
우연히 광대들이 무대에서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기괴하였습니다. 원효는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달음에 삶과 죽음을 벗어난다[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는 글귀에서 말을 따서 이 박의 이름을 ‘무애(無碍)’라고 하며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습니다. 그가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온 마을과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며 불법을 가르치고 읊조리면서 다니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칭호를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아미타불”의 “나무(南無, 귀명합니다)” 정도는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 원효의 감화는 위대했던 것입니다.[앞 책, 같은 곳.)]
 
원효는 당시 사회의 최하층 부류 가운데 하나이던 광대들이 들고 노는 괴상하게 생긴 박을 얻어 이를 흉내낸 ‘무애박’을 만들어 치고 다니며 대중들과 어울려 살았습니다. 그는 “천촌만락(千村萬落)” 다시 말해 당시 신라의 고을과 마을 어디든 두루 다니면서 보살도를 실천하는 대중적 불교를 설법했습니다. 원효는 심오한 불교의 논리를 글로 설명하는 수많은 저술을 남긴 학승(學僧, 공부하는 승려)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전날의 빛나는 업적에 안주하는 대신 민중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서 불교의 논리를 민중들의 언어와 몸짓[무애춤]으로 설파하고 다니는 삶을 살았다는 것은 오늘날까지도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는 사자성어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데요. ‘야단(野壇)’이라는 것은 들판에다 단을 짓고  ‘법석(法席)’, 설법을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는 뜻입니다. 원효 스님은 “야단법석(野壇法席)을 실천하고 다녔다”라고 할 수 있죠. 이런 야단법석과도 같은 지식인들의 진실한 실천은 이 땅에서 2016년의 촛불혁명을 빚어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 땅의 민중들은 야단법석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원효 스님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는 경산시 자인면 북사리의 제석사에 있는 ‘원효성사전’ 내부에 그려져 있는 원효 스님의 일생을 묘사한 팔상도 가운데 원효 스님이 민중들 속에서 설법하는 모습. 사진=필자 제공
 
그의 가르침 덕분에 당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무아미타불” 한 마디는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귀족들만을 위한 귀족불교는 전혀 돌아보지도 않았고, 철저히 이름 없는 무수히 많은 대중들과 삶을 같이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그가 《금강삼매경》의 주요 사상인 범성불이(凡聖不異)와 부주열반(不住涅槃)의 사상을 몸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음을 보여줌니다. 대중 속에서 보살도를 실천하며 살다 간 원효의 삶은 이 땅의 불교가 강한 민중 지향적 전통을 지니도록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원효의 삶은 “야단법석이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가졌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원효가 입적한 뒤, 아들 설총은 슬픔에 젖어 그를 분황사에 모셨습니다.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전하고 있습니다.
 
(원효가) 입적하자 설총이 아버지의 유골을 가루로 만들어 그의 얼굴 모습[진용(眞容)]을 조각상으로 빚어 분황사에 봉안한 뒤 받들고 사모하며 하늘 끝에 닿은 듯한 슬픔의 뜻을 드러내었습니다. 설총이 그 때 원효의 조각상 옆에서 예배를 드리자 원효의 조각상이 갑자기 설총을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지금까지도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로 있습니다.[앞 책, 같은 곳.)]
 
원효의 뼛가루로 만든 조각상이 설총의 예배에 반응했다는 설화는 신라인들이 원효를 성인으로서 얼마나 높이 숭앙했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원효는 어떤 교단에도 속하지 않았고, 어떤 종파도 만들지 않았으며, 어떤 권위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대중들 속에서 보살행을 실천하는 삶을 살다 갔습니다. 그가 남긴 흔적은 《금강삼매경》과 그에 대한 풀이 이외에 ‘화쟁’의 논리가 있습니다. 《금강삼매경》의 주요 사상과 화쟁의 논리는 서로 통하며 상보적입니다.
 
포항의 오어사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원효 스님이 쓰고 다니던 삿갓. 사진=필자 제공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권익도 기자


- 경제전문 멀티미디어 뉴스통신 뉴스토마토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