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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의 한국철학사 15화)원효의 화쟁(和諍) 사상
세상의 모든 아집과 집착을 지움
입력 : 2023-06-26 오전 6:00:00
원효는 여러 불경의종요(宗要)’에 대한 글을 많이 남겼습니다. 가령 《열반경 종요(涅槃經宗要)》라든가, 《법화경 종요(法華經宗要), 《무량수경 종요(無量壽經宗要), 《대혜도경 종요(大慧度經宗要), 《미륵상생경 종요(彌勒上生經宗要)》 같은 저작이 그런 예입니다. ‘종요란 그 경전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뜻합니다. 화쟁의 방법론을 만들어낸 원효답게, 그는 어떤 경전이든 그 가르침의 핵심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종요를 밝히는 저술을 많이 남겼습니다. 핵심은 같은데도 불구하고 지엽말단적인 것을 각각 한 가닥씩 붙들고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싸워서는 제대로 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함께 길을 가는 도반(道伴)들이 서로에게 걸림돌로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엽말단적인 논쟁을 그치도록 하고, 우주의 섭리 안에서 모든 진리는 통한다는 깨달음을 주는 방법론이화쟁이기 때문입니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을 쓰면서, 이 경전의 종요는부처님의 가르침은한 가지의 맛[일미(一味)]’이라는 것이라고 정리했습니다얻을 것이 없는 한 가지의 맛[일미(一味)]이 바로 이 경전의 핵심 가르침[종요(宗要)]입니다.[無所得之一味, 正爲此經之宗之要。(《金剛三昧經》, <正說分> 86.)]
 
이 경전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전개한 것[()]과 종합한 것[()]이 있는데, 종합해서 말하자면한 가지 맛[일미(一味)]’으로 일체 사물을 제대로 보는 실천을 하는 것[관행(觀行)]이 요점입니다. 전개해서 말하자면 열 가지 거듭되는 법문이 핵심 가르침이 됩니다. (…) ‘전개하여 말하자면 열 가지 거듭되는 법문이 핵심 가르침이 된다는 것은 한 가지 갈래의 가르침에서 열 가지 갈래의 가르침까지 늘어나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 가지 갈래란 무엇을 말합니까? 한 마음[일심(一心)] 가운데 한 생각이 움직여서, 하나의 실제[일실(一實)]를 따르고, 하나의 실천[일행(一行)]을 닦아서, 하나의 수레[일승(一乘)]에 오르며, 하나의 길[일도(一道)]에 머물러서, 하나의 깨달음[일각(一覺)]을 쓰며, 한 가지 맛[일미(一味)]을 깨닫는 것입니다.[此經宗要有開有合。合而言之, 一味觀行爲要; 開而說之, 十重法門爲宗。(《金剛三昧經》, <述大義>, 24~28.)]
 
원효는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에서 “부처의 가르침 다섯 수레에 속한 일체의 모든 선함과 이교도의 다른 선함까지도 모두 가르침의 한 가지 수레에 속함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선함은 모두 깨달음이라는 본성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그 몸이 다르지 않습니다.[當知佛法五乘諸善, 及與外道種種異善, 如是一切皆是一乘, 皆依佛性無異體故。]”고 하여, 이른바 외도(外道, 불교의 바깥)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으며, 진리라는 점에서는 서로 통할 수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사진은 목인 전종주 전 호남대 교수의 서예 작품. 사진=필자 제공
 
부처님의 가르침이한 가지의 맛[일미(一味)]’이라는 것은, 부처님이 비록 팔만대장경이나 되는 매우 많은 설법을 하여 다양한 비유나 수많은 논지를 전개했지만, 그것은 그 설법을 듣는 대중들의 받아들이는 기틀(근기)과 소양에 맞추어서 방편으로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겉보기에 서로 모순하거나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더라도 궁극적으로는한 가지의 깨달음[일각(一覺)]’, ‘한가지의 맛[일미(一味)]’, ‘하나의 수레[일승(一乘)]’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의 가르침이란 다름 아니라 중생들이 거품이나 그림자와 같은 이 세상의 참된 모습을 바로 봄으로써 생로병사의 고해(苦海)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법화경》을 인용하여,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오로지한 가지 큰 일[일대사(一大事)]’을 이루려는 인연 때문인데, 그것은 중생들에게 깨달은 이의 지혜의 안목을 열어줌으로써 이 세상의 참된 모습을 밝게 알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원효 당대에 중국에서 유행하던 중관학파와 유식학파가 서로 자기 논리만을 고집하면서 대립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로지한 가지 맛으로서 어떤 가르침도 궁극적으로는 서로 통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하나로 통한다는 것에 대해 《금강삼매경》은한 도시의 사방으로 나 있는 네 개의 대문 비유[일시개사대문지유(一市開四大門之喩)]’모든 강물을 다 받아들이는 바다의 비유[대해포섭중류지유(大海包攝衆流之喩)]’를 통해 설명합니다. 《금강삼매경》에서 범행 장자와 부처님의 대화를 들어보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야, 생각으로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내가 말한 모든 설법은 길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한 것이기 때문에 방편으로써 말한 것이니, 모든 설법의 다양한 모습은 하나의 여실한 뜻의 지혜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비유를 들자면, 마치 한 도시가 사방 네 곳의 대문을 열어놓으면, 네 대문 어느 곳으로 들어오더라도 이 도시로 들어오게 되는 것과 같아서,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자기 뜻에 따라 네 대문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으니, 여러 가지의 다양한 맛을 지닌 설법 또한 이와 같습니다.” 범행 장자가 말하였다. “법이 만약 이와 같다면, 제가한 가지 맛[일미(一味)]’에 머물 때, 마땅히 일체의 모든 맛을 포섭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어째서인가? ‘한 가지 맛의 여실한 뜻은 그 맛이 하나의 커다란 바다와 같아서, 일체의 여러 물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장자야, 일체의 설법의 맛은 마치 저 여러 물줄기가 이름과 크기는 비록 서로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물은 다르지 않은 것과 같죠. 만일 큰 바다에 머물면 곧 여러 물줄기를 모두 포괄하게 되는 것과 같이, ‘한 가지 맛에 머물면 곧 모든 맛을 다 섭렵하게 됩니다.”[(《金剛三昧經》, <如來藏品>, 488~490.)]
 
이처럼 부처님의 모든 설법은한가지 맛으로 통하며, 원효에 따르면모든 설법은 다한 가지 맛으로 들어가도록 하기 위한 방편”[‘方便道故, 皆入一味之方便故。(元曉, 《金剛三昧經論》, <如來藏品>, 489.)]입니다. 그러니 중관학파나 유식학파가 자기의 학설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다 방편으로 말한 것이며, 결국은 네 대문이 한 도시의 도심으로 통하고 모든 강물이 바다에서 만나는 것처럼한 가지 맛임을 깨닫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원효는 《대승기신론 별기》에서, 중관학파는 모든 논리를 깨기만 하는 치우침이 있고, 유식학파는 모든 논리를 세우기만 하는 치우침이 있지만, 말울음소리(아슈바고샤) 보살은 《대승기신론》에서 이 두 학파를 넘어서서세워주지 않음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버리고, 깨뜨리지 않음이 없으면서도 도리어 허용하는논지를 전개함으로써 어느 한쪽에 치우침을 넘어서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원효의 말을 직접 들어보죠.
 
(《대승기신론》의) 논지 전개는 세우지 못하는 바가 없고, 깨뜨리지 못하는 바가 없다. (중관학파의) 《중관론》이나 《십이문론》 등은 여러 가지 집착을 두루 깨뜨리며 또한 깨뜨린 것도 깨뜨리지만, 깨뜨리는 주체[능파(能破)]와 깨뜨리는 객체[소파(所破)]를 다시 인정하지 않으니, 이것을 일러 앞으로 가기만 하고 두루 미치지는 못하는 논리라고 합니다. (유식학파의) 《유가론》이나 《섭대승론》 등은 깊고 얕은 이론을 두루 세워서 법문을 판별하였지만, 스스로 세운 법을 모두 버리지 않았으니, 이것을 일러 주기만 하고 빼앗지 않는 논리라고 합니다. 지금 이 《대승기신론》은 지혜롭기도 하고 어질기도 하며, 오묘하기도 하고 넓기도 하여, 논지를 세우지 않는 바가 없으면서도 스스로 이를 저버리고, 깨뜨리지 않는 바가 없으면서도 다시 이를 허용합니다. ‘다시 이를 허용한다는 것은 저 앞으로 나아가는 논리가 극한에 이르면 두루 세움을 나타내며, ‘스스로 저버린다는 것은 주는 자가 주는 것을 다하면 빼앗게 됨을 밝힌 것입니다. 이것을 일러 모든 논리의 으뜸 논리라고 하며, 모든 논쟁을 고르게 아우르는 주인이라고 합니다.[(元曉, 《大乘起信論別記》, 22~23.)]
 
조금 어렵게 설명하고 있지만, 원효의 설명에 따르면, 중관학파는 세움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기 위해 오로지 깨뜨림만을 주창하였고, 유식학파는 깨뜨림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기 위해 세움만을 주창하였다. 이들은 부처님께서 깨뜨림을 말하거나 세움을 말하거나 모두 방편으로 말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한 쪽에만 집착한 셈입니다. 말울음소리(아슈바고샤) 보살의 《대승기신론》은 이와 달리 깨뜨리기만 하거나 세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세운 논리를 다시 스스로 저버리고, 깨뜨린 논리를 다시 허용합니다. 어느 것이나 다 방편인줄 아는 까닭에 한 쪽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효는 《대승기신론》을모든 논쟁을 고르게 아우르는 주인이라고 높이 평가합니다. 화쟁의 철학자 원효가 《대승기신론》에 대한 풀이글을 쓴 까닭입니다.
 
원효는 이미 《대승기신론소》를 통해, 《대승기신론》에서 전개한 일심이문(一心二門)의 사상을 바탕으로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대립을 지양하는화쟁의 예를 보여준 바 있습니다. 중관학파는 마음의 맑고 깨끗한 면만을 주로 강조해왔고, 유식학파는 마음이 물들고 더러워진 면을 주로 밝혀왔지만, 말울음소리(아슈바고샤) 보살은 《대승기신론》에서 일심이문의 관점을 통해 한 마음에진여문생멸문의 두 가지 전개과정이 함께 있다고 함으로써 두 학파의 대립을 지양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모든 것이 거품과 허깨비와 같음을 깨닫는 진여문의 과정과 동시에, 무명에 의해 물들고 더러워지는 생멸문의 두 과정 속에 존재합니다. 원효는 말울음소리 보살의 일심이문의 관점을 전개하여 진속불이(眞俗不異)의 관점을 드러내었습니다.
 
어떤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논쟁과 화쟁의 수준이 그 시대, 그 사회, 그 공동체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느냐가 바로 우리 사회의 수준과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논의하고 어떤 방식으로 논쟁을 벌이느냐도 중요하고, 그 쟁점에서 어떻게 결론을 도출해내느냐도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 공동체의 최고 결정기관인 국회 같은 곳에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어떤 수준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가가 바로 우리 공동체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오늘날 우리 공동체의 논쟁 수준은 어떠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까? 치졸한 당리당략에 얽매인 논쟁을 넘어서서, 열린 미래를 위한 논쟁을 하고 있습니까? 엄정하게 평가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 국회의 몸싸움 장면. 우리의 국회같은 기구에서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어떤 수준의 논쟁을 벌이는가가 바로 우리 공동체의 수준을 결정한다. 사진=필자 제공
 
오늘날 우리 공동체에게는 논쟁도 중요하지만, 의견의 대립을 어떻게 지양할 것인가 하는화쟁(和諍)’의 지혜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계급적 계층적 이해관계를 앞세워 죽기살기로 싸우는 논쟁으로는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구상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없습니다. 첨예한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나오는 극단적인 분쟁을 어떻게 화쟁(和諍)해내는가에서 우리 공동체의 역량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공동체에서 정치를 하겠다고 하면서화쟁을 고민하지 않고 이해관계와 당리당략의 첨병 구실만 한다면, 그런 사람을 우리가 정치 지도자라고 불러줘야 할 이유를 찾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원효의 기념비적인 저작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은 오늘날 전문이 온전하게 전해오지 않는다. 1937년 해인사에서 대장경을 간행할 때 목판 제9, 10, 15, 16본이 발견되었으며, 1943년 목판 제31본이 발견되었습니다. 원효의 《십문화쟁론》은 고려시기 해인사의 승려 성헌(成軒)이 고려 숙종 3(서기 1098) 원효의 《화엄경소》, 《대승기신론소》와 더불어 원효의 저작이 널리 전파되기를 기원하며 조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십문화쟁론》은 1937년 해인사에서 대장경을 사간본(寺刊本)으로 인쇄하면서 발견되었습니다. 본디 원효는 《십문화쟁론》을 두 권으로 정리했으나, 오늘날은 다섯 개의 목판본만 남아 있어, 학자들은 사라진 내용들은 원효의 다른 저작에서 보충해 추론하고 있습니다.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권익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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