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삼매경》의 세 번째 특징은 수행의 수준이 높아지면 그 인연에 따라 자율적으로 지켜야 할 계율이 원만하게 갖추어진다는 ‘계인연(戒因緣)’ 사상입니다.
불교는 불제자들이 계율을 지켜서 자기 수행을 하는 것을 매우 중시합니다. 그래서 출가를 하면 스승이 제자에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계율’을 주는 것입니다. 구족계(具足戒)[‘구족계(具足戒)’는 비구, 비구니들이 지켜야 하는 계율로, 재가 불교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다섯 가지 계율[오계(五戒)]이나 열 가지 계율[십계(十戒)]에 비해 체계적으로 갖추어진 계율이라는 뜻에서 구족계라고 합니다. 《사분률(四分律)》[인도의 법장부(法藏部)에서 전승해온 계율에 관한 경전. 동아시아 불교의 계율에 가장 널리 영향을 끼쳤습니다.]에 근거해서 비구의 구족계는 250개 조항이 있고, 비구니는 348조항이 있습니다. 이들은 대개 파라이(波羅夷, 파문에 해당하는 중죄), 승잔(僧殘, 파라이보다는 좀 가벼운 죄악, 아직 승려로서 법명이 조금 남았다는 뜻), 부정(不定, 가벼운 계율을 어긴 경우), 사타(舍墮, 탐심으로 재물을 추구하는 행위), 단타(單墮, 일상 생활중의 작은 계율), 파라제제사니(波羅提提舍尼, 음식 방면 규정 등을 어긴 경미한 과실로 참회하면 되는 정도), 중학(衆學, 복장 음식 예절 등 미세한 규정에 대한 경미한 과실), 멸쟁(滅諍, 승려의 계율 위반에 대한 쟁론을 판단하는 일곱 가지 방법) 등의 여덟 가지로 나뉜다]를 받는다는 말은 출가한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금강삼매경》은 이 계율에 대해 매우 충격적인 관점을 제시합니다. 이 경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계율을 말해주는 사람은 선하지 아니하고 교만하기[위설계자(爲說戒者), 불선만(不善慢)] 때문에, 바다의 물결이 일렁인다. (…) 계율의 본성은 텅 비어 있으니 그것을 지니는 이는 어지러워지고 거꾸로 선 것[계성등공(戒性等空), 지자미도(持者迷倒)]입니다.”[《金剛三昧經》, <入實際品>, 405쪽.)]
《금강삼매경》은 전통적으로 불교가 매우 중시해온 계율의 본성이 텅 비어 있으며, 그것에 매달리는 일은 “어지러워지고 거꾸로 선 것[미도(迷倒)]”이라는 극언을 합니다. 이에 대해 원효 스님은 《금강삼매경론》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합니다.
첫머리 가운데서 “계율을 말해주는 사람”이라고 한 것은 계율을 말하는 바가 되는 사람으로 곧 여러 성문(聲聞)을 말합니다. 자신이 지닌 계율에 의지해서 여러 계율을 깨뜨림을 멸시하므로 말하기를 “선하지 않고 교만하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여러 법이 텅 비어 있음[제법공(諸法空)]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따라 잠들어 있으며 바다 가운데 일곱 가지 앎[칠식(七識)]의 파도가 뒤집어지므로 그래서 말하기를 “바다의 물결이 일렁이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계율을 지니는 사람의 잘못과 놓침을 든 것입니다. (…) 일곱 가지 계율의 본성이 모두 텅 비어있고 적막함에 이르므로 말하기를 “계율의 본성 등은 텅 비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문의 사람은 법이 텅 비어있음[법공(法空)]에 통달하지 못하여 계율에 본성이 있다고 집착하여 자신이 계율을 잘 지닐 수 있음에 의지하므로 그래서 말하기를 “그것(계율)을 지니는 이는 어지러워지고 거꾸로 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元曉, 《金剛三昧經論》, <入實際品>, 406~407쪽.)]
경전과 원효의 풀이를 보면, 원효와 《금강삼매경》의 지은이들이 무엇을 경계하고 있는지가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들은 출가한 이들이 자신이 계율을 좀 지킨다고 해서 다른 중생들이 그렇게 하지 못함을 멸시하거나 오만한 태도를 취하면 안 됩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계율을 지킨다는 사실에 기대는 태도를 “어지러워지고 거꾸로 선 것”이라는 극언을 동원해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결국, 나는 계율을 지킨다는 집착, 나는 계율을 지니고 있다는 아상에서조차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열반이나 깨달음이나 좌선이나 삼매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복이나 바라제목차계의 계율이나 포살과 같은 승단에 의지하지 말라고 경계한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구도(求道)에 대한 순수한 열정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의지하거나 기대거나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 원효와 《금강삼매경》 지은이들의 자신감과 열정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모든 삼매를 남김없이 다 깨뜨릴 수 있다는 ‘금강삼매’라는 경전의 이름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시각과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금강삼매경》은 외부에서 타율적으로 주어진 계율을 지키는 것에 만족하여서 자신이 계율을 잘 지키고 있다는 아상과 집착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일깨우며, 나아가 자기를 닦음이 깊어짐에 따라 그 인연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스스로 갖추어가는 계율이 형성되며, 그에 따라 섭률의계(攝律儀戒), 섭선법계(攝善法戒), 섭중생계(攝衆生戒) 등 세 가지 규율이 모두 원만히 갖추어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발생적 윤리에 관한 합리적이면서도 정교하며 아름답고 수준 높은 설명입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윤리 규범은 대체로 외부에서 주어지는데 반해, 《금강삼매경》은 자기 수양이 깊어짐에 따라 스스로 지켜야 할 계율이 따라온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외부의 규범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서 스스로 발생하는 자율적 윤리입니다. 《금강삼매경》의 지은이들과 원효 덕분에 우리는 인간이 외부에서 강제하는 어떤 규범보다도 더 성찰적인 내면의 규범을 만들어낼 수 있는 숭고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행이 깊어질수록 성찰과 계율도 깊어질 것이니
원효는 이를 ‘계인연(戒因緣)’이라고 이름 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계인연(戒因緣)’이라는 개념은 한국 운허용하 스님이 엮은 《불교사전》(서울: 동국역경원, 1994 27쇄)이나 대만의 《불광대사전(佛光大辭典)》(臺北: 書目文獻出版社, 1989, 전8책), 딩푸바오(丁福保)가 엮은 《불교대사전(佛敎大辭典)》(臺北: 佛陀敎育基金會, 2014, 전2책) 등에 항목으로조차도 올라 있지 않습니다. 이는 ‘계인연’ 사상이 다른 불경이나 불교 관련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원효와 《금강삼매경》의 지은이들의 독창적인 사유임을 반증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원효와 《금강삼매경》에 대한 연구가 아직 일천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제가 조사해보니 《계인연경(戒因緣經)》이라는 경전이 있긴 한데, 《금강삼매경》과 원효의 ‘계인연’ 사상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대답하여 ‘계율의 인연[계인연(戒因緣)]’을 설명한 것입니다. (…) 첫머리 가운데 ‘네 가지 인연’이라고 한 것은 한마음의 본디 깨달음의 이로움 가운데 네 가지의 힘의 쓰임을 갖추어서 세 가지 계율의 인연을 짓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는 사라지게 함이 기대어 머무르는 인연[멸의지연(滅依止緣)]이고, 둘째는 생겨남이 기대어 머무르는 인연이며[생의지연(生依止緣)], 셋째는 거두어 간직함이 기대어 머무르는 인연[섭의지연(攝依止緣)]이고, 넷째는 떠남이 기대어 머무르는 인연[리의지연(離依止緣)]입니다. 사라지게 함이 기대어 머문다는 것은 본디 깨달음의 자기 본성이 가진 고요한 공덕이 여러 번뇌의 자기 본성과 서로 어긋남을 말하니, 이 인연으로써 섭률의계(攝律儀戒)를 이룹니다. 생겨남이 기대어 머문다는 것은 본디 깨달음의 자기 본성이 가진 선한 공덕이 모든 선한 뿌리의 자기 본성과 서로 잘 따르는 것을 말하니, 이 인연으로써 섭선법계(攝善法戒)를 이룹니다. 거두어 간직함이 기대어 머문다는 것은 본디 깨달음의 자기 본성이 크나큰 자비심을 이루어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을 말하니, 이 인연으로써 섭중생계(攝衆生戒)를 이룹니다. 떠남이 기대어 머문다는 것은 본디 깨달음의 자기 본성이 반야의 자기 본성을 이루어 일체 사물의 모습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말하니, 이 인연으로써 세 가지 모인 계율로 하여금 사물과 모습을 버리고 떠나서 자기다움[여(如)]을 따라 나아가게 합니다. 앞의 세 가지는 개별적인 인연이고, 뒤의 한 가지는 전체에 통하는 인연입니다. 보살이 마음을 내어 세 가지 계율을 받을 때 본디 깨달음의 이로움을 따라서 받아 지니니, 이 네 가지 인연으로 세 가지 계율을 모두 잘 갖추게 됩니다. (…) 다만 보살이 이 본디 깨달음에 돌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여러 깨달은 이의 원만한 지혜도 똑같이 이 바다에 돌아가기 때문에 ‘깨달은 이의 보리이며 살반야(薩般若)의 바다[불보리살반야해(佛菩提薩般若海)]’라고 하였습니다.(元曉, 《金剛三昧經論》, <眞性空品>, 424~426쪽.)
본디 부처가 깨달음을 얻으면 그 이로움은 자기 자신에 그치지 않고 모든 중생에까지 미친다. 그것은 마치 불타는 집에서 빠져나온 이가 아직 불타는 집 안에 있는 중생들을 집 밖으로 끌어내도록 애써서 함께 삶을 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깨달음을 찾아 길을 가는 보살에게는 그 깨달음의 본디 성질과 어긋나는 것은 버리고, 어울리는 것은 더 생겨나도록 하며 갈무리해서 간직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아껴주는 마음이 생겨나고, 지혜의 원만함을 따르도록 하는 인연이 생겨납니다. 그 결과 섭률의계(攝律儀戒), 섭선법계(攝善法戒), 섭중생계(攝衆生戒)의 세 가지 계율이 원만하게 잘 갖춰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계율을 무조건 지키라고 강요하는 단순무식한 교조주의 원리주의와는 거리가 먼, 타율보다 자율을 소중하게 여기는 매우 앞서가는 윤리학입니다. 인간 세상에 나온 윤리학 가운데, 윤리적 의무에 대해 가장 높은 자율성을 부여한 이론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칸트. 사진=필자 제공
칸트는 “이성적 존재자는 의지의 자유에 의해 가능한 목적들의 나라에서 자기를 항상 법칙 수립자로 보아야만 힙니다”[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윤리형이상학 정초》(서울: 아카넷, 2005), 157쪽.]고 말했습니다. 너 자신이 규범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스스로 도덕률을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자율적으로 만들어내라는 것입니다. 원효와 《금강삼매경》의 지은이들이 말하는 계인연 사상은, 자율적으로 규범을 만들어내라는 칸트의 요구를 넘어서서, 당신의 닦음의 수준이 높아진다면 당신은 점점 더 수준 높은 규범을 지키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다섯 가지 규율을 지키면 깨달은 이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대신, 당신이 깨달음에 다가가고 있다면 여러 가지 규율을 점점 원만하게 갖추어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수행자가 어떤 계를 받을 때에도 이런 인연으로 그 계를 받아서 지키게 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지적이기도 합니다.
원효와 《금강삼매경》의 지은이들이 말하는 계인연 사상은 불교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윤리학 이론이 아니라,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매우 의미심장한 이론입니다. 가령, 오늘날의 사회에서 보살이 아니라 일반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 또한, 직급이 올라가고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커짐에 따라 의무도 커지면서 고려해야 할 윤리적 판단의 수준 또한 높아져야 합니다. 의료인을 예로 들어 보자면, 인턴 의사일 때와 정식 의사가 되었을 때, 과장 의사일 때와 병원장이 되었을 때의 윤리적 판단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 내용은 의학을 전공하는 학생 시절부터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내용이겠지만, 과장 의사가 된다거나 병원장이 된다면, 생명 윤리와 치료 윤리, 사회 윤리 등에 대해 좀 더 고차원적으로 판단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더 정치적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질병과 생명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눈앞의 손익을 떠나서 결행해야 할 일 등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생성적 윤리학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 다 필요힙니다. 검찰 조직원이나 기자도 직급이 높아져감에 따라 그에 걸맞도록 수준 높은 성찰과 깊은 안목의 직업윤리가 필요합니다. 한국의 검찰은 직급이 높아지면 ‘정치적’인 손익계산에만 빨라지는 편향이 강한데, 그보다 더 성찰의 수준이 높아지고 사회와 정치 발전에 대한 안목이 깊어지는 직업윤리가 생성되어야 마땅합니다. 원효와 《금강삼매경》의 지은이들이 생각해낸 계인연(戒因緣) 사상의 전통이 있는 나라에서, 자기 한 목숨 살겠다고 침몰 중이던 배에서 먼저 속옷 바람으로 달아난 선장이 나온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선장처럼 어떤 조직의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지위에 오른 사람이라면 더욱 더 수준 높은 직업윤리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맹자(孟子)》의 기록을 보면, 옛날에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물길을 다스리는 것으로 이름을 날린 우(禹) 임금은 “하늘 아래 물에 빠지는 사람이 생기면 그게 다 자기가 물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에 빠졌다고 여겼습니다”고 했고, 농사짓는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준 후직(后稷)은 “하늘 아래 굶주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다 자기가 농사짓는 법을 제대로 못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굶주린다고 여겼습니다”[禹思天下有溺者, 由己溺之也; 稷思天下有饑者, 由己饑之也。(《孟子》, <離婁下>)]고 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이런 어진 임금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유리 이사금이 민간을 순행하다가 한 할멈이 굶주리고 죽어가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물길을 다스리는 것으로 이름을 날린 우(禹) 임금은 “하늘 아래 물에 빠지는 사람이 생기면 그게 다 자기가 물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에 빠졌다고 여겼다”. 중국 허난성 우저우시 우임금 대로변에 조성돼 있는 치수(治水)하기 위해 고투하고 있는 우임금을 형상화한 조각상. 사진=필자 제공
“내가 보잘것없는 몸으로 임금의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백성들을 잘 보살피지 못하여 늙은이와 어린이로 하여금 이런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입니다.[《三國史記》<新羅本紀 第一> ‘儒理尼師今’, 21쪽.]
유리 이사금은 이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옷을 벗어 이 헐벗은 할매에게 덮어주고 밥을 주어 먹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담당 관청에 명령을 내려 곳곳의 홀아비, 홀어미, 부모 없는 아이, 자식 없는 늙은이와 늙고 병들어 스스로 살아가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문하고 양식을 나누어주어 부양하도록 했다고 기록은 전합니다.[앞 책, 같은 곳.]
지위가 높아지고 권한이 커질수록 우임금과 후직씨, 그리고 유리 이사금 수준의 직업윤리가 생성되어야 마땅하다고 보는 게 계인연 사상의 시각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보살도를 실천하는 이들이 형식적인 몇 가지 계율만 지키면 됩니다고 여기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정말 무상(無上)의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면 우임금이나 후직씨 이상의 무한한 대자대비의 마음을 내어야 마땅합니다. 원효와 《금강삼매경》의 지은이들이 말하는 계인연 사상은 이런 점에서 매우 고차원적이면서 시대를 앞서 나간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강삼매경》의 주요 사상은 원효의 삶의 궤적과 그대로 포개어지는 평행 구조를 보여줍니다. 원효는 자신이 중심이 되어 후대의 경전 《금강삼매경》을 찬술하였으며, 이 경전에서 논한 보살행의 실천과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다음 글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후직. 사진=필자 제공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