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는 출가한 뒤 당나라에 가서 불법(佛法)을 더 배우기 위해 의상(義湘)과 유학을 계획했습니다. 첫 번째 입당(入唐) 시도는 육로로 요동벌을 건너 당나라로 가려다 고구려 군사들에게 붙잡혀 간첩 혐의로 감옥에 갇혔다가, 간신히 탈출하여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두 청년은 바닷길을 통해 두 번째로 입당을 시도합니다. 둘은 항구로 가는 도중 억센 비를 만나 흙구덩이(토막)에서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냥 흙구덩이가 아니라 주검이 가득한 흙무덤이었죠. 원효가 한밤중에 목이 말라 달게 마신 것은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습니다. 아마도 통일전쟁이 치열하던 당시, 전사자들을 한꺼번에 파묻은 무덤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에는 이런 가묘가 삼국의 국경지대 사방에 널려 있었습니다. 원효는 주검 냄새가 진동하는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아늑하다고 여겼던 곳이 사실은 주검이 쌓인 무덤이었고, 달게 마신 물이 사실은 해골 물임을 알게 되자 두렵고 역했죠. 마음에 따라서는 무덤도 아늑한 보금자리가 될 수 있으며, 몰랐을 때는 해골 물도 달콤할 수 있음을 깨달은 원효는, 굳이 여기서 더 가르침을 얻기 위해 당나라까지 갈 필요가 없음을 깨칩니다. 찬녕(贊寧)의 《송고승전(宋高僧傳)》은 조금 다르게 설명합니다.
원효 스님. 원효 대사 표준 영정. 1978년 이종상 화백이 그린 작품. 사진=필자 제공 원효 스님. 원효 대사 표준 영정. 1978년 이종상 화백이 그린 작품. 사진=필자 제공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원효와 의상은 큰 비를 피하려고 흙구덩이에 들어가서 편안히 잤습니다. 아침에 깨어나 보니 무덤 속에서 해골들과 같이 뒹굴었음을 알게 되었고, 다음날에도 비가 계속 와서 하루 더 묵었는데, 무덤이라고 여기니 전날 무덤인줄 모르고 잘 때와 달리 귀신 그림자가 어른거려 뒤숭숭하였습니다. 원효는 이 순간 모든 게 마음에 달려 있음을 깨닫고 당나라에 갈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며 귀국하고, 의상은 외로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납니다. 두 사람이 당나라 유학을 가려다가 서로 다른 길을 간 이야기는 《송고승전》의 <원효전>이 아니라 <의상전>에 실려 있습니다.(《대송고승전》<당신라국의상전>) 원효가 해골물을 마셨다는 이야기는 《송고승전》에는 보이지 않고, 송나라 때의 승려 혜홍(惠洪)이 불교에 관한 일화를 모은 책인 《임간록》에 실려 있죠.
원효가 해골물을 마셨다는 이야기는 《삼국유사》나 《송고승전》 등 원효 전기를 기록한 가장 오래된 두 문헌에는 보이지 않고, 이보다 조금 후대의 문헌인 《임간록》에 처음 보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각색해 끼워 넣은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죠. 그러나 《임간록》의 지은이인 혜홍이 《삼국유사》나 《송고승전》 이외에 다른 기록을 보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또한 그가 원효의 삶을 더 극적으로 윤색해야 할 아무런 동기가 없기 때문에 후대에 보이는 일화라고 해서 반드시 누군가의 각색일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죠. 원효가 당나라 유학길에 주검이 뒹구는 흙구덩이에서 자고 일어나 깨달은 것은, 반드시 선진국에 가서 더 많은 문자를 보아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 어느 땅에서든지 모든 게 한 마음의 작용임을 깨달으면, 바로 단박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러므로 원효는 당나라에 굳이 갈 필요가 없었고, 내가 사는 땅에서 보살의 도리를 제대로 실천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깨달은 거죠. 원효는 이 깨달음을 실천에 옮겼죠. 그의 깨달음은 굳이 불교가 전래되어오지 않았더라도, 이 땅에서도 깨달은 이들이 쏟아져 나올 수도 있었다는 깨달음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의상 스님. 사진=필자 제공
물 건너가는 일을 포기해야 할 때가 닥치나니
원효의 당나라 유학 포기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한국은 19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이 국가 주도로 경제 성장을 추진하면서, 선진국을 빨리 베끼자는 이른바 ‘추격 산업화’[이 개념은 사회학자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전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의 개념입니다. 그와의 논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왔음을 밝혀둡니다.]에 몰입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 역사적 경험 때문에, 이른바 ‘산업화’ 시대를 산 세대들은, ‘선진화’하려면 선진국을 빨리 베껴야 한다는 생각이 고정관념이 되었습니다. 이 세대는 한국이 무언가를 독자적으로 개척하고 전인미답의 길을 걷고자 하면, 지레 겁부터 먹고 그게 되겠느냐는 비난부터 합니다. 추격 산업화 시대가 남긴 고정관념은 그 세대들에게 스스로를 불신하는 노예의식을 깊게 심어주었죠. 전쟁의 폐허밖에 없던 가난한 후진국에서 산업화에 성공하여 오이시디(OECD) 가입 국가가 된 한국은, 이제 베낄 대상이 없어졌습니다. ‘추격 산업화’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가 닥친 것이죠. 베끼기만 하면 될 때는 사실 크게 고민할 게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걸어가 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합니다. 원효처럼 입당구도(入唐求道)를 포기 선언할 때가 닥쳐온 겁니다. 어떤 늪이나 수렁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전인미답의 길을 스스로 판단하고,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와 표준을 만들면서, 새 길을 만들며 가야 하는 겁니다. 원효가 간 길이 바로 그런 전인미답의 길이었습니다. 원효는 새 길이 물 건너 당나라를 향해 나있는 게 아니라, 이 땅의 중생, 그들의 삶의 터전을 향해 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원효의 삶이자 깨달음이자 통찰이자 길이었죠. 원효가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온 뒤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원효가 깨달음을 얻고 다시 계림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틀림없이 자신의 깨달음을 민중적 불교 실천의 도반이자 평생동지이던 대안 스님이나 혜공 스님과 함께 나눴을 것입니다. 원효는 이후 저술 활동에도 많은 시간을 돌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소(疏)·별기(別記)》,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등의 순서로 주요한 저작을 써내려갔습니다. 《대승기신론 소·별기》는 당시 대승불교사상을 집약한 말울음소리[마명(馬鳴), 아슈바고샤] 보살의 《대승기신론》을 대중들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했습니다. 말울음소리 보살의 《대승기신론》이 원효 시대까지 전개되어온 대승불교사상의 주요내용을 담고 있지만, 타인의 저작에 대한 해설을 통해 자신의 깨달음을 담기에는 한계가 있죠.
원효는 자신이 깨달은 핵심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십문화쟁론》을 써서, 당시 전개되던 불교의 여러 학설들이 사실은 한 가지 깨달음을 여러 각도에서 말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설파했죠. 원효의 깨달음의 핵심은 어찌 보면 ‘화쟁(和諍)’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도 있죠. 인도의 보리수 아래에서 얻은 깨달음과 당나라 유학을 통해 얻은 깨달음과 한국의 무덤구덩이 안에서 얻은 깨달음이, 깨달음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으며,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식의 자기중심주의는 되레 깨닫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징표라는 게 화쟁 사상의 핵심입니다. 신라의 고승들은 《십문화쟁론》 이후, 원효의 깨달음을 좀더 전면적으로 담은 저술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런 노력의 결실로 세상에 나온 게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입니다. 지은이의 판단의 근거는,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의 내용이 민중들 속에서 살다 간 원효의 삶의 궤적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먼저 《금강삼매경》이 세상에 나온 과정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가겠습니다.
원효스님의 해골물 설화를 그린 평택 수도사 대웅전의 벽화, 사진=필자 제공
■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