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하얀 턱시도를 차려입고 두 손을 모아 인사하는 정중한 노년의 신사. 대한민국 재즈 1세대 신관웅(77)이 비를 뚫고 무대에 오르자, 마그마처럼 뜨겁게 꿈틀대는 객석.
"비가 오는 최악의 상태임에도 이렇게 자리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caravan'이라는 곡을 할 건데요. 한국의 소싸움이나 달구지를 연상하면서 연주를 해보겠습니다. 옛날에 그런 시절이 있었거든요. 소나기는 오지, 소몰이는 넘어졌지, 허리띠는 풀어졌지, '그거(?)'는 또 나올려고 하지, 껄껄껄."
건반을 팔꿈치로 때리고 손으로 미끄러뜨리다, 피아노 뚜껑을 열어 젖히더니, 맨손으로 피아노 줄을 뜯어대는 '굉음'으로 이어지는 연주를 보면서 '이것이 열혈단신 맨땅에서 일궈온 K재즈의 뿌리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대한민국 재즈 1세대 신관웅(77)이 피아노 뚜껑을 열어 현을 뜯고 있는 모습. 사진=한국재즈협회
지난달 28~30일 서울 노들섬에서 열린 '서울재즈페스타'의 대단원. 피아노 솔로의 고즈넉한 향토적 선율의 곡 '어머니'를 연주할 때, 객석은 아리랑 고개라도 넘듯 숨죽였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미군부대를 돌며 재즈의 꿈을 키우고, 한국에 '재즈란 개척정신'임을 각인시켜온 이날 신관웅의 무대는 2세대(이정식과 웅산), 3~4세대(마리아킴 등)의 후배 재즈 음악가들까지 연결되며, K재즈의 역사를 한 자리에 펼쳐놨습니다.
첫 날 메인 격 행사에는 '서울재즈퀄텟'의 무대가 축제를 예열했습다. '한국 재즈 불모지' 시절인 1980년대 초반 활동(실제 결성과 활동 기간은 1989~1993년 사이) 활동했던 밴드는 지난해 27년 만에 재결성으로 국내 재즈계를 들썩인 팀입니다.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 같은 90년대 가요부터 재즈까지 아우른 '대한민국의 색소폰' 이정식을 필두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드러머였던 김희현, 60~70년대 그룹사운드 ‘김혜정과 검은 장미’(전신 검은나비) 등에서 활동한 장응규 등이 뭉친 팀.
관악기의 금빛 통 안에서 뿜어지는 경조(京調)에 가까운 시김새 선율, 그러나 재즈적 화성을 뼈대에 둔 음의 곡선이 자욱한 안개의 수묵담채 같은 미학으로 무대를 물들였습니다. 장벽을 허물고 경계를 넘어서는 재즈의 진경을 펼쳐냈습니다.
한국재즈 2세대 이정식. 사진=한국재즈협회
1~2세대가 몸소 보여준 '장벽을 허무는 재즈'는 하루 4공연씩 총 3일간 3~4세대로 이어졌습니다. 국내 대표 탱고 재즈 밴드인 ‘라 벤타나(feat. 유사랑)’ 무대를 시작으로 재즈와 국악을 접목하여 새로운 사운드를 펼치는 ‘박윤우&NKCM’, 힙합과 펑크, 일렉트로닉 장르 등을 접목하는 익스페리먼트 재즈 밴드 ‘쿠마파크’ 같은 출연진들이 음의 지류를 이어갔습니다. 블루스 풍 기타 선율로 빌 위더스 'Ain't No Sunshine'를 길게 늘어뜨리며 객석을 적신 재즈 기타리스트 SAZA의 무대도 특기할 만 했습니다. 히트곡 '나는 남자다'를 재즈로 편곡하고, 소울블루스의 교과서 같은 곡 'I'd rather go blind'를 낮게 부르는 가수 김장훈의 무대는 이색적이었습니다.
"서울에 곧 258m 규모의 '서울링'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런 하드웨어를 이용한 관광객 유치도 중요하지만, 소프트웨어도 함께 발전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세계를 휩쓰는 K팝처럼, K재즈가 세계로 나아간다면 진짜 우리가 선진국 반열에 오르지 않을까 합니다."(김장훈)
이 행사는 2021년부터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재즈의 날(매년 4월 30일)’에 맞춰 열려오고 있습니다. 세계 재즈의 날에는 한국 외에도 99개국에서 다양한 기념 공연이 열립니다. 이 기간 행사 중 하나인 ‘글로벌 올스타 콘서트(일명 세계 재즈 올림픽)’는 올림픽처럼 도시를 옮기며 개최돼왔습니다. 재즈보컬리스트이자 한국재즈협회장인 웅산은 앞서 본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 축제를 ‘제 2 한강의 기적’처럼 만들고 싶다고 했습니다. 향후 노들섬을 중심으로 폭 1km 남짓의 한강을 활용해 '세계 재즈 올림픽'을 열고 싶다고. 'K재즈의 세계화'를 목표로 서울시 예산을 받아 진행되고 있지만, 협회 측은 더 큰 포부를 그리고 있습니다.
"한국 재즈사에서 꼭 있어야할 축제를 만들었다고는 생각합니다. 기적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에 감사하고, 내년에는 한중일을 시작으로 세계로 뻗어가고 싶어요.”(웅산)
축제 기간 웅산이 말한대로, 재즈에서의 ‘대화(컨버세이션)’는 곧 ‘즉흥(임프로바이제이션)’입니다. 한강에서 세계인들이 대화하는 날, K재즈는 세계로 뻗어갈 겁니다.
지난달 28~30일 서울 노들섬에서 열린 '서울재즈페스타'. 사진=한국재즈협회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