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수많은 음악 장르 가운데 예쁜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그래서 순간의 미학이 최고조에 달하는 재즈 같은 예술이 있을까.
기타·피아노·베이스·드럼이 흡사 대화를 나누듯 연주를 주고 받으며 한 폭의 풍경을 만들어가는 인터플레이. 스윙과 비밥, 급기야 프리와 아방가르드까지 넘어간 수많은 음(音)의 대화는, 세차게 타오르다 진한 여운이 남는 폭죽 같은 것이기에 더 없이 값진 시간 예술이다.
올 한 해 한국에서도 MZ 세대를 중심으로 재즈 열풍이 불었다. 숏 콘텐츠와 밈 등 뉴미디어의 확산과 발전은 멜 토메(1925~1999)가 묻고 엘라 피츠제럴드(1917~1996)가 답한 '재즈란 무엇이라 생각하세요'까지 고대 유물 발굴하듯 세상 밖으로 캐냈다. 김준과 이정식, 웅산 등 1~2세대 재즈 음악가들부터 한국재즈수비대, 보컬리스트 마리아 킴, 김유진 같은 신흥 재즈 연주자들도 주목할 만한 활동을 전개해오고 있다.
재즈 베이시스트 정호 정규 1집 '뷰티풀 마인드'. 사진=정호
지난달 재즈 베이스 분야에서도 이색적인 음반이 나왔다. 콘트라베이스(Contrabass) 연주자 정호(42)가 발매한 정규 1집 '뷰티풀 마인드(Beautiful Mind)'다. 파커 시대에 스윙과 비밥을 넘나든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1926~2002년)의 '릭'(재즈계 거장들이 남긴 클리셰적인 프레이즈(곡조). 재즈에서는 거장 영향을 음악에 자연스레 녹이는 것이 관례)을 토대로, 재즈 연주자로서의 오랜 숙성을 거쳐 나온 음반이다.
최근 상암 인근 카페에서 만난 정호는 "헤비메탈과 얼터너티브 록 밴드도 경험했던 제가 재즈를 18년 간 해온 것은 레이 브라운의 영향이 컸다"며 "재즈라는 음악이 어둡고 우울하기만 하지는 않음을 증명해보이고 싶었다"고 했다.
ECM(1969년 만프레드 아이허가 독일 뮌헨에 세운 음반사) 스타일의 키스 자렛 같은 대중적 멜로디의 첫 곡 'Remind'를 지나면, 앨범명과 동명의 보사노바 풍 리듬의 곡 'Beautiful Mind'가 흘러나온다.
피아노 퀄텟 편성으로, 대중음악에서도 많이 쓰이는 펜타토닉 스케일을 차용했다. 러셀 크로우 주연의 동명의 영화에서 서사적 영감을 받은 곡.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 끝까지 믿고 기다려주는 '신뢰'에 대해 생각했어요. 아름다운 마음으로 사람들과 같이, 서로 공감하고 어울릴 수 있는 평화로운 세상이 왔으면 해요."
정규 1집 '뷰티풀 마인드' 낸 재즈 베이시스트 정호. 사진=정호
말 그대로 음반은 뷰티풀 마인드로 그려낸 시간 예술이다.
10개월 간 곡을 쓰고 연주자들(재즈 기타리스트 박갑윤, 재즈 피아니스트 오영준, 드러머 김경태)을 불러 모았다. 재즈에서 중요한 인터플레이를 살리려, 한 공간에서 리허설 없이 동시 녹음(원테이크) 하는 방식을 택했다. 녹음 기간은 이틀, 하루 11시간 씩. 빌리지뱅가드 같은 재즈클럽에서, 연주한 것들을 믹스·마스터링해서 내놓는 게 진짜 재즈 음반이란 생각에서다.
"보통 재즈 연주자들은 거장들의 릭 위에 자신 만의 즉흥연주를 더하는데요. 한 번 지나고 나면 다시는 그것과 완전히 똑같이 연주할 수 없는 언어 같은 거예요. 이번 앨범에서는 미스 노트가 나면 나는 대로, 또 박자가 빨라지거나 느려지거나 상관없이, 퓨어 한 재즈를 해보자 했어요. 음악이 가진 순수함, 깨끗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음악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화이트 노이즈(White Noise)'라는 곡은 피아노 퀄텟과 기타트리오, 두 개의 버전이 수록됐다. 백색소음처럼 자신의 음악이 늘 대중들 곁에 가까이 있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다른 수록곡 'Patience'는 콘트라베이스가 활을 켜는 보잉 주법으로 문을 연다. 현 울림이 이끄는 음의 고저는,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희로애락에 관한 서사를 실어 나른다. 앨범 8곡 중 'Long Way To Go'(재즈 기타리스트 김중회의 곡)를 제외한 자작곡들에선 오스카 피터슨의 뭉근한 사운드를 받쳐주는 레이 브라운의 탄탄하고 안정된 연주가 스쳐간다.
"브라운은 찰스 밍거스나 지미 블랜턴처럼 솔리스트로서 두각을 나타낸 베이스 연주자는 아니었어요. 같이 연주하는 다른 연주자들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아랫사운드를 아주 탄탄하게 만드는 연주자였죠. 가장 베이시스트다운 연주자였던 것 같아요. 모나지 않은 노트 초이스와 그것을 정박자에 치는 감각적인 스윙감. 브라운의 연주들은 사실 크게 난해하지 않아요."
정규 1집 '뷰티풀 마인드' 낸 재즈 베이시스트 정호. 사진=정호
재즈계의 수많은 라이브 무대에 서왔지만, 데뷔 18년 차 늦깍이로 음반을 낸 터라, 아쉬움이 많다. 올 겨울, 내년 가을 을 목표로 2집 음반 작업에 불을 지필 예정이다.
"재즈계의 수많은 라이브 무대에 많이 서왔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추억만 있고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간 숙성돼 차오른 이야기들을 족적으로 남기는 게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집에선 기존 스탠더드 넘버 2~3곡을 제껏으로 편곡해서 넣을 생각을 하고 있어요."
석양지는 어느 수평선을 그가 상상했다. "누군가 사계절을 돌아볼 수 있는 재즈라고 해주더군요.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음악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