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1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 공군 1호기에서 내리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뉴스토마토 임유진 기자] 5박7일 일정으로 영국·미국·캐나다 순방을 떠난 윤석열 대통령이 첫 스텝부터 꼬여버렸다. 조문 없는 조문 외교를 펼친 모양새가 되면서 책임 주체를 놓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문재인정부 청와대에서 의전비서관을 지냈던 탁현민 전 비서관은 "결례는 영국이 아닌 우리가 했다"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은 유엔총회가 열리는 미국 뉴욕으로 이동했다.
윤 대통령은 영국 도착 첫날인 지난 18일(현지시각)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시신이 안치됐던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홀을 찾아 고인을 추모하려 했지만, 현지 교통 사정으로 취소됐다. 윤 대통령은 조문을 하지 못한 채 1시간가량 진행된 리셉션에만 참석했다. 반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트뤼도 캐나다 총리 등은 리셉션 참석 전 무사히 조문을 마쳤다. 윤 대통령은 다음날인 19일 장례식에 참석한 뒤에야 조문록을 작성했다. 이를 두고 해외 각 국 정상과 비교되면서 '외교 결례' 논란이 불거졌다.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19일 런던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서 브리핑을 통해 "어제 이른 오후까지 도착한 정상은 조문할 수 있었고, 런던의 복잡한 상황으로 오후 2~3시 이후 도착한 정상은 오늘로 조문록 작성이 안내됐다"고 했다. 김 수석은 외교 결례 논란에 "위로와 애도가 줄을 이어야 하는 전 세계적인 슬픈 날"이라며 "확인되지 않은 말들로 국내 정치를 위한 이런 슬픔이 활용되는 것은 유감"이라고 했다.
대통령실이 강한 유감을 표명했음에도 논란은 계속됐다. 타 정상들은 현지 교통 상황을 사전에 인지하고 도보로 이동하는 등 조문을 마쳤다. 주요 7개국(G7·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캐나다, 이탈리아) 정상들을 비롯해 심지어 서방과 불편한 관계인 중국의 왕치산 부주석도 조문을 마쳤다.
김성환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20일 당 회의에서 "미국, 캐나다, 일본, 중국을 비롯해 브라질, 우크라이나 조문 사절단도 모두 교통 통제 조건에서 조문했다"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운동화를 신고 걸어서 조문했다"고 지적했다. 김 의장은 "교통 통제를 몰랐다면 무능한 일이고, 알았는데도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면 더 큰 외교 실패, 외교 참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또 "서거 당일부터 여왕 이름을 오타를 내고 조문을 빼먹는 모습을 보며 국민은 왜 윤 대통령이 영국에 갔는지 의문을 갖게 됐다"고 쏘아붙였다. 대통령실은 지난 9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추모 메시지를 내면서 여왕 이름 'Elizabeth'를 'Elisabeth'로 잘못 표기한 바 있다.
5박7일 일정으로 영국, 미국, 캐나다 순방에 나선 윤석열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으로 향하는 공군 1호기에서 기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제공)
결국 대통령실을 비롯한 외교부 등 정부의 총체적인 준비 소홀이 질타 대상이 됐다.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이날 MBC와 CBS라디오에 잇달아 출연해 "조문록 작성이 조문을 대신할 수 있냐"고 반문한 뒤 "대한민국 정부의 준비 소홀과 조율 미숙"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영국이 결례한 게 아니다. 우리가 결례한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이 현지 교통 사정을 이유로 조문하지 못한 것을 두고는 "육개장 먹고 발인 보고 왔다는 것"이라고 빗댔다.
탁 전 비서관은 "더 근본적인 문제는 지금 영국 대사의 공석"이라며 "기본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현장을 컨트롤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외교 경험이 미숙한 대통령을 거기다 그냥 던져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탁 전 비서관은 "일찍 가면 됐다"며 "시간도 얼마든지 조정해서 출발할 수 있는 전용기로 가면서 그 시간을 못 맞췄다는 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지적했다. 영국의 사전 공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사전에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설명을 다 해주는 쪽"이라며 "심지어는 정상 앞에 놓는 종이의 색깔까지도 지정해 주니까, 영국이 시간별 운용계획에 대해서 한국 정부에게 얘기해 주지 않았을 거라고 판단하는 건 무리"라고 단정했다.
김대중정부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도 한 라디오에서 "외교부와 대통령실 의전팀의 무능함을 뭐라고 얘기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 전 원장은 "대통령이 비행기에서 기자들한테 3개 일정이 있는데 잘못하면 둘밖에 못할 수도 있다고 말한 것도 말이 안 된다"며 "대통령의 일정은 시골 이장님이 장에 가는 일정이 아니다. 좀 똑똑했으면 좋겠다"고 쓴소리를 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같은 날 원내대책회의에서 민주당 주장을 "금도를 넘은 근거 없는 비판"으로 규정한 뒤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대표해 외교 활동을 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전체를 대표하는 대표선수에 대한 응원과 예의를 지켜주길 부탁한다"고 했지만, 같은 당의 허은아 의원은 "조금 더 조율하고 조금 더 준비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이 같은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윤 대통령의 취임 후 첫 다자외교였던 지난 7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 참석 당시에도 공식 홈페이지에 AP4(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 정상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 윤 대통령 혼자만 눈을 감고 있는 사진이 올라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노룩 악수' 동영상도 유튜브 등을 통해 퍼지면서 뒷말을 낳았다.
한편 윤 대통령은 20일 오후(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총회에 참석한다. 윤 대통령은 10번째로 연단에 서 우리 말로 기조연설에 나선다.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미국 등 국제사회의 공조를 당부한다는 방침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 간 협력과 연대를 강조하고 글로벌 공급망 구축 등 경제안보 중요성도 역설할 예정이다. 다만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에 제안했던 '담대한 구상'의 재언급은 없을 것이라고 대통령실은 전했다.
윤 대통령은 같은 날 오후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과 만나 유엔과의 협력 강화와 국제 현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다. 2박3일 간 뉴욕에 머무르면서 다자외교도 펼칠 계획이다. 윤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연쇄 양자 회담을 하고, 바이든 대통령 부부가 주최하는 리셉션에도 참석한다. 다만, 한일 정상회담 성사 여부 및 형식을 놓고는 한일 간 이견도 노출됐다.
임유진 기자 limyang8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