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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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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범종입니다.
달빛요정과 나의 '행운아'

2024-04-05 19:16

조회수 :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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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난 그때보다 더, 무능하고 비열한 사람이 되었다네…절룩거리네!"
 
체념과 자조가 뒤섞인 이 노래 '절룩거리네'를 시작으로 달빛요정을 알게 된 지 10년이 되어갑니다. 이 원맨 밴드의 정확한 이름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본명 이진원(1973~2010)은 PC통신 시절부터 쓰던 아이디 달빛요정에, 미래가 안 보이는 삶을 격려하려 역전만루홈런을 붙여 노래 제목과 밴드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달빛요정의 노래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삼십대 남자의 낙오자 선언이면서도 삶에 대한 의지로 가득한 일기 같습니다. 1집 '절룩거리네'에선 "내 발모가지 분지르고 월드컵 코리아! 내 손모가지 잘라내고 박찬호 20승! 세상도 나를 원치 않아. 세상이 왜 날 원하겠어. 미친 게 아니라면"이라며 월드컵 4강, 박찬호 20승에 열광하는 세상과 내 인생의 괴리를 노래합니다. 3집 '치킨런'에선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인생의 영토를 '주공 1단지'로, 아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초라한 내 모습을 '키 작고 배 나온 닭 배달 아저씨'로 표현합니다. 쇼펜하우어 잠언집 읽다가 책 덮고 들으면 딱입니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미완성 유고집 '행운아'. (사진=이범종 기자)
 
털복숭이 요정이 잘난 세상과 나의 괴리를 노래하자, 막다른 골목에서 위로받은 청춘들이 화답했습니다. 1집만 내보자던 달빛요정은 어느새 3.5집까지 내면서, 연봉 1200만원을 꿈 꿀 수 있는 '성공한 루저'가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인생의 슬픔만을 강조한 게 아니라, 불행을 패자의 시선으로 전복하며 희망의 끈도 놓지 않으려 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다 2010년 11월 뇌경색으로 쓰러진 달빛요정은, 영원히 꿈 꾸는 서른 일곱 살이 되었습니다. 그의 노래에 위로 받아온 나도 이제 같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나는 요즘 그의 미완성 유고집 '행운아'를 읽고 있습니다. 행운아는 1집 '인필드 플라이(Infield fly)' 수록곡 제목인데요. 편집장에 따르면 달빛요정 이진원은 낙천적인 삶을 살았지, 비참하게 살다 가진 않았다는 뜻도 담았다고 합니다. 노래 속 요정은 "알 수 없는 그 어떤 힘이 언제나 날 지켜주고 있어"라며 긍정적인 자기 최면을 겁니다.
 
하지만 요정은 이 책에서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열망이 가득하지만 그 열망이 현재의 비관적인 현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건 이율배반적"이라며 "그 희망적인 미래조차 땀의 대가가 아닌 행운일 수밖에 없는 추악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현실인식에서 출발한 노래"라고 설명합니다. 불행을 파는 루저, 달빛요정 답습니다.
 
요즘 나도 내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지나면 내일 오니까 내일도 살고, 살았더니 피곤해서 자고, 일어나니까 모레도 살았습니다. 그런데 내 나이에 숨진 달빛요정의 못다 쓴 머리말을 읽으며, 삶에 대한 의지를 키우고 있습니다.
 
"책을 썼습니다. 누가 읽을지도 모르고 별 자신은 없지만 돈을 준다길래 책을 썼습니다. ··· (중략) ··· 산울림의 김창완 아저씨가 한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연기는 돈 줘야 하지만 음악은 돈 안 줘도 해. 근데 저는 이 알량한 음악질 이외에 잘 하는 게 없군요. 허접한 외모에 빠르고 더듬는 말투"
 
여기까지가 달빛요정이 쓴 머리말입니다. 나는 달빛요정이 살지 못한 (만)서른 여덟 살과, 서른 일곱 살에 예측하지 못한 행운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행운아가 될 겁니다. 비록 그 과정이 비루하고 추잡하고 거추장스럽고 상스러운, 세상에 대한 민폐라 할지라도요. 그런데 어차피 나보다 세상이 더 건방지니까 괜찮습니다.
 
"덤벼라 건방진 세상아! 이제는 더 참을 수가 없다. 붙어보자, 피하지 않겠다. 덤벼라 세상아!"('나의 노래', 3집 '굿바이 알루미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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