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 법원행정처가 법원 내 진보성향의 판사들의 사법개혁 움직임을 부당하게 견제하려 했다는 의혹이 일부 사실로 드러나 파문이 예상된다. 사회적으로 주목됐던 ‘법관 블랙리스트’는 없는 것으로 결론 났다. 그러나 블랙리스트가 존재할 것으로 의심받고 있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컴퓨터에 대한 직접적인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논란은 계속 될 전망이다.
법원행정처의 사법개혁 저지와 ‘법관 블랙리스트’ 의혹 등을 조사해 온 대법원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는 18일 지난 한달여간의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법원행정처 소속 이모 부장판사(서울고법)는 법원 내 법관들 연구 단체인 국제인권법연구회장직을 마친 뒤 연구회 활동을 주시하면서 법원행정처 주례회의에서 상황을 주기적으로 보고하고, 상고법원제나 대법원장 인사권 등 민감한 사항을 다루지 말 것을 연구회원 판사들에게 종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특정 회원 법관에게 예산이나 인사사항 등을 거론하면서 공동학술회의를 연기하거나 축소하도록 압박한 것으로 확인됐다. 조사위는 “적정한 수준과 방법의 정도를 넘어서는 부당한 행위이며, 법원행정처에 미리 보고가 된 뒤 실장회의 등에서 논의된 공동학술대회 관련 대책들 중 일부가 실행된 이상 법원행정처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조사위는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의 전문분야연구회 중복가입을 제한한 것도 사실로 확인하고 사법행정권의 남용이라고 판단했다. 조사위는 이날 “전문분야연구회 중복가입 해소조치는 비록 기존 예규에 따른 집행이기는 하나 그 시기와 방법, 근거, 내용과 시행 과정 등에서 시급성과 필요성 및 정당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해소조치 전후 사정에 비춰 국제인권법연구회나 공동학술대회에 대한 제재로 볼 만한 의심스런 정황이 많다”며 “이는 법원행정처가 예규의 집행이라는 명목으로 국제인권법연구회 또는 공동학술대회를 견제하기 위해 부당한 압박을 가한 제재조치로서 사법행정권의 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국제인권법연구회 기획팀장으로 활동한 이모 판사가 지방법원에서 법원행정처로 인사발령을 받은 뒤 사표를 낸 것에 대해서도 “이 부장판사가 이 판사에게 공동학술회의 연기 및 축소 등을 요구한 것은 부당한 지시와 간섭이고, 결국 이것 때문에 이 판사가 법원행정처로 발령받은 뒤 사표를 낸 것으로 보인다”며 “법원행정처도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조사위는 ‘법관 블랙리스트’의혹에 대해서는 법원행정처가 제출한 자료만을 바탕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조사위는 고영한 법원행정처장에게 기획조정실 컴퓨터와 서버에 대한 조사협조를 요청했으나 고 처장은 작성자의 동의가 없는 한 조사 요청에 수락할 권한이 없다며 거부했다. 대신, 조사위가 요구한 서류만 임의제출 형식으로 조사위에 보냈다.
지난 3월5~6일 법원행정처가 사문화된 판사들의 연구회 중복가입 금지 원칙을 근거로 연구회에 중복한 법관들의 탈퇴 등을 종용하고 진보성향의 국제인권법연구회가 계획한 학술회의를 축소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또 이 연구회 소속 판사가 법원행정처로 인사명령을 받았으나 돌연 취소되면서 인사전횡이라는 의혹도 함께 나왔다. 이에 양승태 대법원장은 지난 3월13일 사법연수원 석좌교수로 있는 이 전 대법관을 진상조사위원장으로 임명한 뒤 진상조사에 대한 전권을 위임했으며, 이 전 대법관은 일선 법원에서 추천받은 판사들로 조사위를 꾸린 뒤 진상을 조사해왔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난 3월27일 오전 서울 송파구 문정동 동부지방법원 신청사에서 열린 준공식에서 사법부 고위 인사들과 함께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