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기철·조용훈기자] 장엄하고 아름다웠으며, 거룩하기까지 했다. 100만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이 서울광장과 광화문광장을 포함해 서울 도심 골목골목까지 운집했지만 어지럽다기 보다는 평화로웠다. 광화문 광장 뒤에서 집회를 구경하던 캐나다인 마이클 오헨(38)씨는 “마이클잭슨 콘서트 같은 분위기지만 차분하고 안정된 진행에 놀라웠다. 촛불파도가 매우 아름다워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외신들도 이날 한국의 집회 분위기를 전 세계로 긴급 타전했다. 로이터통신은 “중고등학생들과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들까지 참여한 대규모 집회였지만 평화적 행진을 이어갔다”며 “폭력적이던 과거 양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보도했다. 중국 신화통신과 영국 BBC 등도 “대규모 집회였지만 침착한 분위기에 진행됐다”고 전했다.(편집자주)
지난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태극기를 든 어린이가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3차 촛불집회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12일 민중총궐기 3차 집회인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_박근혜’ 촛불집회의 본 행사는 오후 4시였지만 이미 오전부터 서울광장과 광화문 과장에는 집회 참가자들로 붐볐다. 이날 오전 9시부터는 각 광장에서 시민의회 솥뚜껑 퍼포먼스, 자유발언대, 1박2일 텐트농성이 시작됐다. 오후부터 서울 곳곳에서는 서울 광장으로 집결하기 위한 사전 집회가 서울 도심 여기저기서 열리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사법부도 집회 정당성 인정
오후로 들어서면서 열기는 더욱 고조됐다. 사법부 역시 청와대 인근 구간의 집회와 행진을 경찰이 막을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날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재판장 김정숙)는 민중 총궐기 본부가 서울지방경찰청장을 상대로 낸 4건의 집행정지 신청을 일부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대통령에게 국민의 목소리를 전달하고자 하는 이 사건 집회의 특수한 목적상 사직로, 율곡로가 집회 및 행진 장소로서 갖는 의미가 과거 집회들과는 현저하게 다르다"며 "이 행진을 전면 제한하는 것은 신청인의 집회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오후 4시 서울광장에서 본격적인 집회가 시작되면서 청와대를 향해 외치는 “박근혜 퇴진” 구호가 거세게 파도쳤다. 이 시각 참여 시민은 주최측 추산 25만명, 경찰 추산 총 14만6000여명으로, 8개 지역에서 집회가 진행됐다. 광화문 광장에 8000명, 세종로타리에 6000명, 세종대로에 5만2000명, 청계로에 1만명이 모였다. 4시부터 본집회가 시작된 서울광장에는 3만3000명이 집회에 참여 중이며 을지로에 1만5000명, 소공로와 서린R에도 1만1000여명이 모여 "박근혜 하야"를 한 목소리로 외쳤다.
“박근혜 퇴진은 국민의 명령”
세월호 참사, 고 백남기 농민 사망, 경북 성주 고고도미사일체계(사드) 배치 피해자들도 참석해 ‘박근혜 퇴진’ 목소리를 더했다. 4·16세월호가족협의회 전명선 운영위원장은 “박근혜는 이제 이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다”라며 “청와대에서 당장 내려오라는 것이 국민의 명령”이라고 말했다. 고 백남기씨의 큰딸 백도라지씨는 “아버지가 1년전 이 대회 참석하셨다가 사고를 당하셨다. 1년이 지났지만 현실은 더 나빠져만 가는 것 같다”고 개탄했다.
서울광장 집회는 이소선 합창단의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공연으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다. 여기에 정혜경 민주노총 위원장은 구속 기소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옥중 편지를 대리 낭독해 분위기를 달궜다. 한 위원장은 편지를 통해 “국민들은 거리로 나와 국민과 함께 하는 지도자를 요구한다. 11월 안에 반드시 박근혜를 퇴진시키고 구속시키자”고 촉구했다. 5시부터는 도심 행진이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서울광장을 출발해 종로, 서대문, 을지로 등을 거쳐 청와대와 가까운 율곡로 남쪽까지 행진을 이어갔다. 이 중에는 박근혜 정부의 죽음을 알리는 상여도 등장했다.
지난 12일 서울광장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박근혜 정부의 죽음'을 표현한 상여가 지나고 있다. 사진/박민호 기자
광장에서 광장으로 이어진 열기
서울 광장의 열기는 이원 방송으로 광화문 광장에 그대로 전달됐다. 시작 전부터 방송인 김제동씨의 사회로 분위기를 이어가던 광화문 광장은 서울광장 집회 시작과 행진에 맞춰 구호와 제창을 함께 했다. 광화문광장 사회를 맡은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추억 속 구호 “독재정권 타도하라”를 패러디 한 “박근혜씨 퇴근해요” 구호를 유도하면 분위기를 이끌었다. 서울광장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될 때는 광화문 광장 역시 같은 곡조가 울려 퍼졌다.
거대한 국민 문화제로
서울광장 시민들의 행진이 진행되고 오후 7시30분에는 광화문광장 본집회가 이어졌다. 이 시간을 기점으로 주최측은 집회 참여인원 100만명 돌파를 알렸다. 가수 모세, 크라잉넛, 방송인 김미화씨 부부 등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집회장은 거대한 문화제로 진화했다. 이날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른 손병휘씨는 “요즘 저는 5000만원짜리 텐트에서 자고 있다. 이순신장군 동상 아래이다. 순실이 누나는 없지만 순신이 형이 있다”며 "온 우주가 명령한다. 박근혜는 물러가라"고 외쳐 공감을 이끌어냈다.
이어 발언기회를 얻은 방송인 김제동씨는 헌법상 대통령 불소추특권을 지적한 뒤 “나라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것이 내란이고, 세종대왕은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셨다. 국민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것이 내란이다. 그럼 박 대통령은 내란을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독일에 있는 모녀가 국내 질서를 어지럽히도록 놔둔 것은 외환의 죄”라며 비판을 이어갔다.
“오늘 집회, 역사적으로 기록될 것”
공개 발언에 나선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는 “오늘 우리는 대한민국 이 땅에 다시는 불의가 깃들지 못하도록 정의를 위해 모였다. 이 모임은 공화정을 가장 결정적이고 근원적이고 자각적인 그때였다고 인류의 모든 역사는 기록할 것”이라고 집회의 의미를 강조했다.
또 “우리의 미래희망인 꽃다운 생명들이 세월호와 더불어 침몰하는 것을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방관하고, 혼의 비정상 운운하면서 역사국정교과서를 강압적으로 제작하며, 위안부문제를 일본침략자들의 구미에 맞게 합의했다”면서 “박근혜 대통령님. 이미 당신이 저지른 끔찍한 일은 사죄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루속히 물러나야 한다. 하야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12일 오후 서울광장부터 광화문광장까지 꽉 차 들어선 집회 시민들. 사진/박민호 기자
“대구 경북 민심도 ‘박근혜 하야’”
대구에서 올라온 한 시민은 공개발언 기회를 얻어 “대구와 경북 상주는 모두 박 대통령에게 속았다는 것이 민심”이라며 박 대통령 하야를 외쳤고, 제주에서 올라온 시민대표도 제주 특산품인 감귤을 예로 들며 “이명박 대통령 때부터 썩기 시작해 지금은 완전히 썩은 박근혜 정부는 퇴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회 열기가 고조되면서 일부 집회 시민이 내자동로터리에서 청와대 방면으로 북진을 시도하다 자정이 넘은 시각까지 경찰과 대치했고, 한 시민이 경찰을 폭행한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지만 집회는 공식 종료시간인 오후 10시30분을 기점으로 질서 정연히 정리됐다. 시민들은 자진 해산해 귀가했으며 일부 시민들은 직접 나서 쓰레기를 치워 훈훈함을 전했다.
“집회로 더러워지는 것 원치 않아”
수원에서 온 김리현(19·여)씨는 “자유발언을 못해서 아쉬운 마음이 크다”며 “이렇게 쓰레기라도 치우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늘 집회에 같이 못 온 친구들이 자기들 몫까지 열심히 하고 오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조민지(19·여)씨도 “막차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최대한 치우다 갈 생각”이라며 “집회 때문에 서울이 더워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전남 광양에서 올라온 이광표(29)씨는 오히려 손사래를 치며 학생들을 칭찬하기도 했다. 쓰레기봉투가 어디서 났냐는 질문에 이씨는 “주변에 파는 데가 없어서 종각까지 갔다 왔다”며 “나보다는 학생들이 더 대단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나는 학생들이 치우는 거 보고 동참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촛불집회에서는 광화문광장 일대에 노점상과 편의점 등에서 파는 생수와 커피, 김밥 등을 구입하려는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뤘으며 인근 일부 식당은 재료가 동이 나기도 했다.
최기철·조용훈 기자 lawc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