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다. 특별한 날 어느 한 사람의 추억이 담긴 옷을 입는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는 소중한 인연이다. 면접일, 결혼식 등을 앞두고 옷 때문에 고민하는 이들에게 '누구나 멋질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비영리단체가 있다. '열린옷장'이다. 열린옷장은 옷장 속에 잠들어 있는 정장을 기증받아 정장이 꼭 필요한 사람들과 공유하는 곳이다. 공유하는 것은 단지 정장만은 아니다. 기증자는 옷에 담긴 추억과 경험을, 대여자는 감사의 마음을 나눈다. 정장이라는 수단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연결된다. 열린옷장을 통해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라는 희망을 안고 사는 한만일 대표를 만나봤다.
[뉴스토마토 임효정기자] 열린옷장은 팍팍한 현실에서 취업준비생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프로젝트로 시작됐다. 기증받은 정장을 세탁, 수선을 거쳐 면접을 앞둔 청년들에게 대여를 해주는 시스템이다. 직장인 몇몇이 모여 아이디어를 냈고, 2012년 3월 열린옷장은 기증과 대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한만일 열린옷장 공동대표. 사진/뉴스토마토
정장 10벌로 시작해 지금은 '1500벌'…도움의 손길도 이어져
현재 열린옷장은 프로젝트를 기획한 김소령, 한만일 대표가 공동대표로 운영하고 있다. 한 대표는 30대 초반에 직장을 그만두고 열린옷장에 뛰어들었다.
"쉽지는 않았습니다. 열린옷장이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기존 직장을 그만둔다는 결정은 참 어려웠죠. 하지만 시작한 일에 책임을 지고 싶었습니다."
열린옷장이 문을 연 당시 대여할 수 있는 정장은 10벌 뿐이었다. 그 공간에 지금은 남성정장 1000벌, 여성정장은 500벌까지 늘었다. 정장의 치수도 다양해지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대여의 기회를 줄 수 있게 됐다. 열린옷장을 찾는 대여자는 하루에 적게는 70명에서 많게는 120명 정도다. 취업준비를 하면서 옷 한 벌 마련해놓는 사람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처음에는 기증할지도 의문이었고, 기증을 받는다고 해도 '남이 입던 옷을 면접 등 중요한 일에 입고 가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많은 분들이 필요로 했고, 사연도 다양했죠."
초기 목적은 취업준비생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함이었지만, 대상이 점점 넓어지면서 이제는 정장을 필요로 하는 남녀노소가 이곳을 찾고 있다.
기증하는 사연도, 대여하는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엄마가 첫 교생 실습 때 입었던 옷, 전국노래자랑에서 1등할 때 입었던 옷, 사고로 휠체어를 타게 되면서 입을 수 없게 된 옷 등 옷 안에는 저마다 깊은 사연들이 녹아있다. 때문에 기증자들이 기증하는 것은 옷만이 아니다. 옷과 함께 자신의 추억, 그리고 응원의 메시지까지 대여자들에게 보낸다.
대여한 옷에는 기증자의 이름이 붙어있기 때문에 대여자는 기증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으며, 기증자의 사연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여자들은 감사의 마음을 다시 전한다. 대여한 정장을 입고 합격했다는 소식, 정장 덕분에 동생 결혼식을 잘 마쳤다는 감사의 글, 딸 상견례를 잘 치르고 왔다는 소식 등 소소한 일상사와 함께 감사의 마음이 전달된다.
열린옷장이 정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공간으로 자랄 수 있었던 데는 주변의 도움이 컸다. 열린옷장을 꽉 메운 옷들은 기업 기증이 아닌 개인 기증이 대부분이다. 때문에 이들 모두가 도움의 손길이다. 현재도 매월 600벌가량의 옷을 기증받고 있다. 옷 뿐만이 아니다. 옷이 늘어나면서 마땅한 공간이 없자, 남는 사무실 공간을 건넨 손길도 있었다. 6개월간 무상으로 빈 사무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 또 열린옷장이 소개된 신문을 보고 세탁을 맡아주겠다고 나선 세탁소 사장님도 있었다. 경기도 하남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이 사장님은 현재 3년째 열린옷장의 세탁을 책임지고 있다.
"옷만 기증받아서는 지금의 열린옷장은 없었을 것입니다. 수선, 세탁, 코디 교육까지 주변에서 도움을 주시고 있어요. 그래서 더 힘이 나고,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움을 받은 만큼 수익을 나누는 데도 열심이다. 운영비를 제외한 수익은 다시 나눔의 손길로 쓰여진다. 취약계층 대학생에게 식권을 기부하는 비영리단체 십시일밥에 지난 3월 1500만원을 기부했으며, 관악고용센터를 통해 차상위계층에게 정장을 무상으로 대여해주고 있다.
정장은 물론셔츠, 구두, 넥타이 등도 기부받아 대여한다. 사진/뉴스토마토
보증제가 없는 '공유옷장'…온라인으로 확장
대부분의 대여에는 보증이 뒤따르게 마련이지만, 열린옷장에는 보증제도가 없다. 하루에 100여벌의 옷이 대여되고 반납되는 공간에서 보증제가 없다는 것은 쉽지 않다. 현실은 더 놀랍다. 열린옷장의 미회수율은 0.5%에 불과하다. 한 대표는 "지금까지 열린옷장에서 정장을 대여해간 사람이 4만명인데, 이 가운데 반납되지 않은 정장은 0.5% 정도로 그 비율이 매우 낮다"고 말했다.
열린옷장의 취지가 취업준비생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인 만큼 보증제로 또 다른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게 한 대표의 생각이다.
"이 사업에 대해 첫 질문이 '반납'에 대한 부분입니다. 주위에서 리스크가 큰 렌탈사업을 하면서 어떻게 보증금 없이 대여를 할 수 있냐는 말을 많이 듣죠. 첫 번째 저희 원칙이 부담을 줄여주기 위함인데, 보증금으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게 되는 것은 저희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도 보증금 제도를 도입할 계획은 없습니다."
열린옷장은 비용부담을 더 낮추기 위해 온라인 대여 부분을 강화할 계획이다. 현재 오프라인과 온라인 대여의 비율은 9 대1 정도다. 정장은 직접 입어봐야 하기 때문에 온라인으로 대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열린옷장은 온라인 대여를 위한 고민을 지난 3년간 해오며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개발해왔다. 지금까지 대여자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통계를 산출했으며, 이에 따라 자신의 치수를 입력하면 그에 맞는 옷을 추천해주는 방식의 시스템이 곧 도입된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 오프라인 예약이 초과돼서 빌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온라인 대여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어요. 온라인 대여가 활성화되면 대여자가 늘어나고, 그렇게 되면 대여 가격도 낮출 수 있겠죠. 최종적으로 대여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게 목표입니다."
남성의 경우 정장 상·하의, 벨트, 넥타이 등을 빌리는 데 드는 비용은 총 3만2000원, 여성은 3만원이다. 열린옷장의 장기적인 목표는 정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무료로 옷을 대여할 수 있는 공유옷장이 되는 것이다.
"나중에는 도심 한 가운데 열린옷장 매장을 마련해서 기증자의 옷을 멋지게 전시해놓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무료로 빌려갈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전세계에 하나 밖에 없는 그런 공간을 꿈꿉니다." 지난 5년간 열린옷장에 있었던 많은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한 대표의 꿈이 그리 멀지 않아 보였다.
임효정 기자 emyo@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