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조승희기자] 한 석유화학업계 CEO는 지난해 말 이란을 찾았을 당시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다고 한다. 경제제재 기간에도 꾸준히 교류하면서 친분을 쌓았다고 생각해 온 이란의 한 국영 에너지 회사 최고경영자(CEO)가 그에게 "한국 기업이 이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먼저 알려달라"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란의 국영 에너지기업 CEO가 자국에서 행사하는 힘은 일반 기업과는 다르다. 국영석유회사(NIOC)·국영석유화학회사(NPC)·이란국영가스회사(NIGC)·이란국영정유유통회사(NIORDC) 등 이란 석유부에 소속된 4개 기업의 CEO들은 '차관' 직함까지 겸하며 정책까지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이란투자진흥청에 따르면 지난해 3~11월 사이에 총 47개국, 245개 경제사절단, 3763명이 이란을 방문할 정도로 그야말로 '이란 러시'가 이어지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이란 국영 에너지기업과의 협력에 주력한다.
제재의 빗장이 풀리며 전 세계로부터 '투자 러브콜'을 받고 있는 이란의 콧대는 높아질대로 높아져 있다. 이란은 2014년 기준 세계 4위의 원유 매장량과 세계 2위의 천연가스 매장량을 보유한 에너지자원 부국이다. 총 8000만명 인구로 중동에서 두 번째로 큰 내수시장까지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다 핵무기 개발로 서방의 경제·금융 제재로 9년 동안 설움을 겪고도 살아남았다는 자부심까지 더해져 있다.
한국무역협회 관계자는 "이란은 GCC,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경제권과 연결되는 전략적 요지에 있어 성장잠재력이 매우 높을 뿐 아니라 경제활동인구 71.5%, 학구열도 매우 높아 풍부한 노동력과 소비시장을 바탕으로 경제의 활력이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특히 오랜 경제제재로 해외 소비재에 대한 욕구가 커서 철강·기계류 등 중화학공업, 자동차, 스마트폰, TV, 의료용기기 등의 수출 가능성도 높다.
다만 이란 정부는 해외 기업들이 단순히 이란을 투자의 땅으로만 활용하기보다, 협력관계를 통해 기술 이전까지 함께 원하고 있다. 최근 세계 최대 풍력발전기 제조업체인 덴마크 베스타스(Vestas)는 이란 풍력산업 지원을 위해 관련 기술을 이란재생에너지기구에 이전하는 협력사업을 시작했다. 또 이란과는 계약이 체결되고도 추후 취소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고 한다. 재계 관계자는 "대림산업이 이달 초 이란 수력개발공사와 체결한 수력발전소 건설 계약은 원래 중국 기업과 체결된 계약이었으나 이란 정부가 중국의 융자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해 취소했던 건"이라고 말했다.
향후 이란에서 가장 활발히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 중 하나는 정유공장의 현대화 프로젝트다. 총 9개 정유공장 가운데 8개 공장이 업그레이드와 신규 정유 신설 등에 대규모의 투자가 예상되는 상황으로, 우수한 정유공장 기술력을 갖춘 국내 건설사들에게 이는 기회로 작용할 전망이다. 석유화학 분야는 향후 800억달러 규모의 투자를 통해 연간 생산능력을 2025년까지 현재의 3배인 1억8000만톤으로 늘리겠다는 계획도 추진 중이다. 이미 중국과 러시아 등은 이란 시장에 깊숙이 파고들어 상당부분을 선점한 상태다. 중국의 이란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1~10월 누적으로 25.7%로, 경제제재가 본격 시작된 2013년보다 7.6%포인트 늘었다.
국제유가 향방의 '키'도 이란이 쥐고 있다. 올해 저유가 기조가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가운데, 이란이 오는 6월2일로 예정된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의에서 산유국들의 '산유량 동결'에 동참한다면 공급과잉 해소 기대감으로 국제유가가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달 로크네딘 자바디 이란 석유부 차관(NIOC 사장)이 6월 이란의 원유 생산량이 제재 이전 수준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언급하는 등 산유량 동결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만약 이란이 이번에도 불참한다면 공급과잉 우려로 국제유가는 또 다시 하락 압박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20년 장기집권한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도 최근 교체된 가운데, 산유국들의 예상치 못한 결정으로 유가가 급등·급락한다면 이는 국내 정유사들의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조승희 기자 beyond@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