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민주주의의 위기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국민이 주인이 되어 지배하는 정치제도라는 이름이 무색하리만큼 대한민국의 정치계는 해가 거듭할수록 실망스러운 행태를 보여왔다. 오는 4월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이같은 실망은 더욱 커져만 간다. 민의를 대변한다는 명분 뒤에 숨어 실제로는 자리다툼만 일삼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리는 선거에 참여율이 떨어져 가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선거가 세상을 바꾸는 도구라고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민주주의 제도 자체의 오류와 함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금기처럼 여겨져온 게 사실이다. 대의제로서 효능을 다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어느새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어 불가침의 영역에 자리하고 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허울 좋은 수식어가 민주주의에 그 자체로 만능의 것, 불변의 것이라는 신화를 덧씌운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정말 이대로 두어도 괜찮은 것일까. 고정불변하는 절대가치로 박제화되어가는 민주주의, 대다수 사람들의 실제 삶과 괴리되며 정치인들만의 잔치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민주주의를 그냥 두고 보아야만 하는가. 민주주의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는 가운데 모두가 알면서도 차마 말하지 못하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속시원히 언급하는 책이 나와 주목된다. 신간 '선거파업(안치용 지음, 영림카디널 펴냄)'은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조목조목 짚어내고, 대안을 모색하는 책이다.
책을 열면 첫 장부터 거부감을 느낄 사람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현재의 금권적이고 과두적인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를 전면 쇄신해야 한다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선거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꽤나 파격적으로 보이는 이같은 주장 뒤로 선거 파업에 나서야 하는 이유가 곧장 이어진다. 저자가 보기에 한국에서 여당인 새누리당,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모두 자본의 이익과 그들의 이익을 지키는 것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기득권이다. 모두가 썩었고, 그 가운데 차라리 새누리당은 솔직하게 썩었다는 게 미덕이라고 하는 저자의 주장 속에는 현실정치에 대한 염증이 그대로 묻어난다.
아무리 현실이 시궁창이라고 해도 선거를 파업해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책을 읽다보면 이같은 생각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대안 없는 주장처럼 이 책 역시 공허하게 흘러가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저자의 영리한 선택이 돋보이는 것은 바로 이 지점부터다. 막상 책의 본 내용에는 선거 파업보다는 왜 선거 파업을 주장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더 큰 지분을 차지한다. 저자는 책의 절반 정도를 할애해 이 땅에 민주주의가 수입되는 과정, 왜곡되는 과정을 낱낱이 분석한다. 미국군이 한반도 이남을 점령하면서 민주주의가 타자에 의해 이식됐다는 점, '해방공간'을 지나면서 개신교가 이념화되고 그 중 일부는 정치 세력화했다는 점, 역대 정권들이 대체로 지역주의를 고착화하는 데 일조했다는 점,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로 엘리트주의와 금권정치가 한국사회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다는 점 등을 들며 이로 인해 민주주의가 급기야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저자는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는 반민주주의라는 주장을 수많은 근거들로 뒷받침하고 난 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변화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즉, 국민의 삶과 무관한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새로운 민주주의를 점진적으로 모색하자는 이야기다.
저자는 프랑스와 미국 등의 예를 들며 대의제 민주주의의 위기를 세계적 관점으로 확장한 뒤 종국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럼에도 민주주의만이 희망이라고 역설한다. 단, 민주주의가 희망이 되는 데는 전제가 붙는다. 여러가지 상상력이 덧입혀져 민주주의의 포트폴리오가 바뀌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책에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시작된, 추첨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대통령을 추첨으로 뽑을 수는 없지만 입법과 행정, 사법 등 많은 부문에서 추첨은 민주주의의 본령을 구현하는 유력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래야 금권제와 과두제, 부패와 무능에 빠진 정치를 타파하고 민주주의를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추첨민주주의가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가 찍히기는 하지만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 추첨과 선거의 적정 포트폴리오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 도출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제법 설득력이 있다. 이밖에도 전자민주주의, 국민소환, 국민발안, 국민투표 등 직접민주주의 요소들을 혼합해 민주주의 믹스로 대의제 민주주의를 혁신해 나가자는 내용이 이어진다.
이 책의 저술에는 저자 안치용 외에도 김용재, 박예람, 서종민, 성지원, 송윤아, 송은하, 정연지, 조응형, 조휴연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저자가 이끄는 '지속가능바람청년학교'의 정기 독서모임 '송이학교'에 매주 화요일마다 참여하고 있는 대학생들이다. 이들 집단 지성의 힘을 빌어 민주주의와 관련된 각종 책과 사회조사 자료들을 모은 후 저자가 정리했다. 저술과정 자체가 이 책 속의 주장, 즉 토론과 합의를 통한 발전 모색과 닮아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정답이 아닌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 본다면 충분히 재미있고 유용하게 읽을 만한 책이다.
김나볏 기자 freenb@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