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큰 풍파를 이겨낸 30대 재벌은 총 자산이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뛰어넘을 만큼 외적 규모를 급격히 늘렸다. 이 기간 상위 기업집단과 하위 기업집단 간 양극화는 심화됐고, 심지어 골목상권까지 넘보는 상황이 전개됐다. 부가 소수 재벌에 집중되면서 재벌에 대한 국가경제 의존도 또한 커졌다. 재벌 독주 시대다.
재미있는 점은 1987년 정부가 공정거래법을 개정하며 내건 명분이 '재벌의 경제력 집중 억제'였다는 데 있다. 이는 박근혜정부 공약과도 일치한다. 30여년 동안 역대 정부들이 동일한 과제를 안고 있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문제 해결은 지지부진했다. 정부 정책이 표심을 노린 구호에만 그치면서 재벌의 기득권은 확대 재생산됐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공정거래 정책 출발부터 어긋났다고 지적한다. '독점규제및공정거래에관한법률'이 국무회의를 처음으로 통과한 것은 1980년 12월로, 이는 당시 비상시국을 이용해 재벌을 길들이고 군부에 반대하는 여론을 재벌로 돌리려는 신군부의 정략적 의도에 기인했다는 평가다.
대규모 기업집단을 규정한 공정거래법 개정은 그로부터 7년 뒤였다. 개정안은 재벌의 출자총액을 제한하고 동일 계열사가 서로의 주식을 취득하지 못하도록 한 게 핵심이었다.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을 막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개정된 법안도 재계의 수정 요구와 저항으로 숱하게 조항이 바뀌는 신세로 전락했다.
재벌개혁은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DJ정부 들어 탄력을 받는다. 당시 30대 기업집단 중 절반이 무너질 만큼 상황은 급박했다. 정부가 메스를 들 명분과 여론의 뒷받침이 형성됐다. 하지만 재벌 수술과 함께, 생존을 위해 출총제를 폐지해달라는 재계의 요구도 수용했다.
그 결과, 30대 재벌들은 그 어려운 시기에도 출자를 늘려 지배력을 다졌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출총제가 폐지된 1998년부터 재도입된 2001년까지 30대 기업집단의 출자총액은 17조7000억원에서 50조8000억원으로 3배 가까이 폭증했다. 같은 시기 각 재벌 총수가 지배구조 최상단에 위치한 계열사에 대해 가지는 지배권은 17.5%에서 26.8%로 늘었다. 문제가 커지자 정부는 3년 만에 출총제를 부활시켰다.
투명하고 공정한 경제 구현을 목표로 내건 참여정부는 출자 고리를 끊기 위한 지주회사 도입과 재벌 소유구조 개선을 추진하는 대신 출총제 완화를 당근으로 제시했다. 동시에 기존 자산 총액 4000억원 이상으로 규정한 대기업집단의 기준을 자산 총액 2조원 이상으로 상향 조정했다. 재계는 지배구조 개선은 시간을 끌면서도, 대신 완화된 출총제를 빌미로 법의 실효성을 걸고 넘어졌다.
출총제 폐지라는 재계의 염원은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주창하고 나선 이명박정부 들어 실현됐다. 출총제가 사라지자 30대 재벌은 마음 놓고 계열사를 늘렸다. 출총제가 폐지되기 전인 2008년 806개였던 30대 기업집단의 계열사는 이명박정부 말기인 2012년 1220개까지 늘어났다. 한 해 평균 83개의 계열사가 새로 생겨난 셈이다.
금산분리 정책 역시 이런 식으로 고삐가 풀렸다. 정부는 1986년부터 기업집단 소속 금융 및 보험 계열사에 대한 의결권 행사를 엄격히 제한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때 국내 금융자본이 외국자본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자, 재벌이 금융 계열사의 지분을 30%(특수관계인과 합산) 이상 보유할 경우 경영권과 관련된 사항에 한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게 시작이었다.
2006년 기업의 자금조달을 도와야 한다는 명분으로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주도 아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보유 지분율을 점진적으로 완화, 2008년에는 15%까지 조정됐다. 정권이 바뀐 2009년에는 재벌이 보유할 수 있는 은행의 의결권 지분을 기존 4%에서 9%(금융위원회 승인시 10%까지 가능)로 늘렸다.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확대는 재벌의 사금고화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투자확대와 경제살리기'라는 신기루를 넘진 못했다.
이로 인해 2000년부터 2015년까지 30대 기업집단이 보유한 금융·보험 계열사 수는 74개에서 112개로 증가했으며(10대 기업집단 35개→47개), 같은 기간 금융·보험 계열사 자산은 255조5610억원에서 626조5840억원으로 145.2% 늘었다.
경제민주화를 외치며 등장한 박근혜 정부 역시 집권 이후 재벌개혁을 등한시했다. 경제개혁연구소가 올해 8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집권 3년차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관련 공약 이행은 42%에 그쳤다. '경영진의 불법행위에 대한 집단소송제 도입',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행위를 규제할 공정거래법 개정', '신규 순환출자 금지 등 재벌 지배구조 개선' 등은 아예 진척이 없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인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아예 "국가경제가 '재벌의 인질'이 됐다"고 주장했다. 경제력이 재벌에 집중되면서 국가경제의 재벌 의존도는 더 커졌고, 이에 정치권력은 재벌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경제살리기를 명분으로 재벌을 적극 비호했던 역대 정부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송원근 경남과학기술대 교수는 "정부가 IMF 이후 재벌정책의 방향을 잘못 잡았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일단 재벌을 살리는 것에 중점을 두면서 경제력 집중 문제는 정책 목표에서 멀어졌다"며 "재벌 3·4세로 가면서 경제력 집중이 고착화돼 이젠 정부 개입이 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