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원주율은 무의미한 숫자의 나열이다. 그러나 이 무의미한 숫자들이 모여 원을 만든다. 연극 <달나라 연속극>은 가난한 자의 삶을 이 원주율에 비유한다. 아무런 의미도, 희망도 없는 삶이 연속되지만 함께 견디며 손을 맞잡고 공동체라는 의미를 만들어낸다.
<달나라 연속극>의 작가 김은성은 삶을 견디는 방법 중 하나로 이야기를 꼽는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 때 견딜 만해지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the Glass Menagerie)>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극중 등장하는 인물들은 원작과는 달리 쉽게 부서지는 유리동물의 모습이 아니다. 좌절 속에서도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데 그 생명력의 밑바닥에는 바로 '이야기'가 있다.
삶을 견디는 방법으로 이야기를 내세우기 위해 작가는 주요인물에 변화를 줬다. 원작의 로라와 <달나라 연속극>의 은하는 둘다 절름발이이고 자기집착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만 자기세계에 빠져 있는 양상에 다소 차이가 있다. 은하는 로라처럼 유리동물 조각을 수집하는 대신, 이야기의 힘을 빌어 원주율을 외운다. 이야기로 숫자들 간의 관계를 만들어 내며 수천자리까지 읊어 내려가며 삶을 견뎌낸다.
은하의 남동생 은창이 삶을 버틸 수 있는 근간도 결국 이야기이다. 원작의 톰의 경우 영화감독의 꿈과 생계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집을 떠나지만 은창은 집을 떠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간다. 비록 미완성이고 현실성도 약한 작품이지만 끊임없이 사회공동체의 회복을 암시하는 시나리오를 써내려 간다.
그러나 무리수인 원주율 마냥 옥탑방에 사는 이 가족이 겪는 슬픔의 이야기는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랫집에 사는 신방과 대학원생 일영은 절름발이 여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사라지는 원작의 짐 역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더욱 입체적인 역할을 한다. 일영은 청소부로 일하는 이들의 어머니 여만자의 이야기를 빌려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상을 받은 후 방송국 PD가 된다.
결국 가족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완성하기는 커녕 정작 이야기의 소재로 전락하고 만다. '인물의 감정을 겉으로 표출하지 않게 함으로써 내상을 극대화 하는' 김은성 작가 특유의 비극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특히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이러한 극의 느낌을 적절하게 살렸다. 연극은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어딘가 스산한 감정을 자아냈다.
연극은 극중 내내 매력을 뿜어내던 이야기꾼 은창에게 마지막 희망을 건다. 일영이 떠난 어느 겨울 날 어머니와 은하의 마음은 얼어 붙은 보일러처럼 차가워진다. 원주율 외우기와 시나리오 창작도 이제는 동력을 잃은 듯하다. 그러나 은창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온몸으로 절규하는 듯한 트위스트를 추면서 가족의 마음을 다시 한번 녹여낸다. 아마도 한바탕 춤이 끝난 후, 달이 올려다 보이는 옥탑방에서 이 가족의 연속극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야기로 삶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내야 하므로.
작 김은성, 연출 부새롬, 제작 달나라동백꽃 출연 성여진, 배선희, 허지원, 강기둥, 무대 김다정, 조명 최보윤, 의상 김미나, 분장 이지연, 음악 배미령, 그래픽디자인 노도연, 27일까지 연우소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