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의사소통을 할 때 사람들은 주로 말을 사용한다. 의미를 보태고자 약간의 몸짓을 취하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몸짓이란 대개 말의 곁가지에 그치고 만다. 춤이나 움직임에서 해방감을 느끼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이리라. 소통의 영역에서 말은 몸보다 친숙하지만, 동시에 관습적이며 일상적이다.
몸과 말이 만나는 연극의 묘미가 여기에 있다. 극단 신작로의 작품 <숨 쉬러 나가다>는 몸으로써 말의 영역을 확장하는 연극이다. 배우의 온 몸이 입이 되고 말이 되어 공간을 누빈다. 빈 무대를 사용한 덕분에 몸의 말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 공연은 1938년에 쓰여진 조지 오웰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15년 동안 좋은 남편과 아빠 노릇을 한 45세 중년의 보험영업사원 조지 볼링이 주인공이다. 항상 돈 걱정뿐인 아내, 점점 짙게 드리워지는 파시즘의 그림자, 전쟁을 암시하는 폭격기의 굉음을 피해 고향으로 낚시하러 떠나는 한 사내의 이야기가 작품의 기본 틀거리다.
연극은 조지 오웰의 소설을 2인극으로 풀었다. 두 명의 배우가 모두 조지 볼링 역할을 맡는다. 덕분에 관객은 볼링의 내적 갈등을 가시적으로 즐길 수 있다. 원작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도 모두 조지 볼링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배우들이 성대모사로 박사, 웅변가, 잔소리꾼 아내의 특성을 절묘하게 풀어내는 덕에 인물 흉내는 희극적 코드로 작동하기도 한다.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지점은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앙상블이다. 한껏 치켜올린 바지와 멜빵 때문인지 두 배우는 이야기꾼 내지 만담꾼처럼 보이는데, 이 둘은 서로 다른 결의 연기를 펼치면서 한 인물의 성격을 강화한다. 이밖에 단순한 재현을 넘어서서 배우 개인의 캐릭터까지 투영해내는 연기 방식을 택한 것도 극 중 인물의 설득력을 높이는 대목이다.
배우 김승언이 마임을 연상케 하는 몸 동작과 성대모사에서 장기를 보인다면, 배우 이종무는 소시민 조지 볼링의 순수한 내면을 표현하며 극의 중심을 잡는다. 그러면서도 같은 연기 동작, 가령 앞뒤로 몸을 흔들다가 한발짝 가볍게 점프하면 공간을 이동하는 식의 설정이 곳곳에 포진해 있어 이 둘을 한 인물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공감각적 심상을 활용하며 장면을 넘어가는 점도 흥미롭다. 각색자는 소설 속에서 연극성, 다시 말해 소설과 시 중간 어디쯤에 있는 부분을 절묘하게 뽑아냈다. 현재의 시점에서 말똥 냄새를 맡다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 시절의 성당 종소리를 들으며 시공간을 뛰어넘는 등 무대는 감각적 상상력으로 가득차 있다. 후각의 기억에서 청각의 기억으로 넘어가는 대목에서도 배우가 매개체가 된다. 말에 간단한 동작이 더해지니 마치 마술과도 같이 장면이 열린다.
조명의 역할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숨 쉬러 나가다>는 소시민의 일상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 기저에는 다가올 전쟁에 대한 불안감, 현대문명에 대한 낯섬이 깔려있다. 차가운 느낌의 흰색 조명은 배우의 동선과 심리를 표현하는 역할을 주로 하면서 몸의 말에 의미와 깊이를 더한다.
일주일간의 일탈을 통해 '일상 빼고 모든 게 다 가짜'라는 사실을 확인한 조지 볼링은 결국 일상으로 돌아오고 만다. "도대체 왜 나같은 인간이 이런 고민을 해야 하지?"라는 말과 함께 이윽고 몸의 말이 끝나고 공연내내 풍성했던 심상도 사라진다. 연기를 마친 배우들은 덤덤한 목소리로 조지 볼링의 생과 더불어 파시즘과 전쟁을 피해가지 못했던 현대사를 읊는다. 소설과 시의 중간 어딘가에 있는 연극을 통해 한 세계의 상실을 실감나게 목도한 후 마주하는 빈 무대. 관객의 머릿속에는 조지 볼링이 던진 또 하나의 물음이 남게 된다. "그 세계란 영영 가버린 걸까요?"
원작 조지 오웰, 각색 극단 신작로, 연출 이영석, 출연 김승언, 이종무, 조명 정태민, 25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3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