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미애 기자] 국가의 인권침해 사실을 밝혀놓고도 '소멸시효의 덫'에 걸려 피해보상을 받지 못했던 국가의 범죄행위 희생자들이 폭 넓게 구제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국가는 소멸시효를 내세워 피해자 보상에 소극적이었다.
소멸시효는 손해를 안 날부터 3년(민법)이나 불법행위를 한 날부터 5년(예산회계법)이 지나면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이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수십년전에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 피해자들은 그 진실이 밝혀져도 '소멸시효'라는 '시간의 장벽' 앞에 가로막혔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나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이 국가의 조직적인 불법행위를 규명해도, 정부는 "피해자가 소송을 늦게 냈다"면서 손해배상을 거부했고, 법원도 이 같은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을 받아들여 왔었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30일 ‘울산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407명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대법원이 국가의 배상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6·25전쟁 당시 좌익으로 몰려 총살당한 울산보도연맹 회원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전쟁이나 내란 시기에 개인에 대해 국가기관이 자행하거나, 국가권력의 비호나 묵인 아래 조직적으로 자행된 기본권 침해에 대한 구제는 통상의 법 절차에 의해서는 사실상 달성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국가가 생사확인을 구하는 유족들에게 진상을 은폐해놓고 ‘집단학살의 전모를 어림잡아서라도 왜 미리 소송을 내지 못했느냐’고 탓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국가가 뒤늦게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해 채무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꼬집었다.
울산보도연맹은 1949∼1950년 정부가 좌익 관련자를 전향시키고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조직한 국민보도연맹 산하 울산지역 단체로 대외적으로는 전향자로 구성된 ‘좌익 전향자’ 단체임을 표방했지만 6·25 전쟁 발발 이후 집단총살 당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6년 10월 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개시, 이듬해 11월 말 울산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 명단 407명을 확정해 발표했다.
이후 유족 500여명은 희생자의 억울한 죽음과 이에 따른 정신적 피해를 배상하라며 소송을 냈고 1심에서 “국가는 유족에게 51억4600만원(이자포함 200억여원)을 지급하라”는 승소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2심은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5년)가 1955년 이미 완성돼 국가에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며 1심 판결을 뒤집었다.
이번 판결에 대해 서울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국가가 불법을 저지른 뒤 진실을 은폐하면 피해자가 진상을 알 방법이 없는데 단지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면탈을 한다는 것은 국민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며 “‘울산보도연맹’ 대법원 판결로 인해 ‘시간의 벽’에 가로막혀 있던 다른 의문사 사건 피해자들의 줄소송을 가져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 국가범죄 피해보상, 불과 10년 전엔 ‘모르쇠’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국가가 자행한 반인권 범죄에 대해 법원은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피해자 배상에 대해선 ‘소멸시효’를 이유로 손해배상 청구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9년 법원은 나주 집단학살, 문경학살 사건 손해배상 소송에서 이들 사건이 모두 국가 주도의 반인륜 범죄라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며 국가에게 배상책임은 묻지 않았다.
1950년 주민 97명이 총살된 나주학살 사건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53년에 이미 불법행위를 인지한 만큼 지난해 소송을 제기한 것은 늦었다는 것이다. 49년 주민 86명을 사살된 문경학살 사건도 마찬가지 이유로 피해자측의 손해배상 청구가 기각됐다.
당시 피해자 측 변호인은 두 사건 모두 과거사위에서 2년 전에야 해당사건을 국가의 위법행위로 결정해 “구체적 진실규명이 뒤늦게 이뤄졌다”며 “소멸시효는 이 때부터 3년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현행법상 불법행위의 인지시점을 과거사위의 결정이 내려진 이후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 국가범죄 늦게라도 대가 치뤄야…소멸시효 배척 판결
최근 들어 국가가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저버리고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면 늦게라도 그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소멸시효 배제를 인정한 사건은 간첩 가족의 누명을 쓰고 고통을 당한 2003년 ‘수지 김’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법원은 1987년 발생한 ‘수지 김’ 사건에 대해 “국가가 위법행위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신의칙상 위배된다는 이유로 42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2008년 수원지법 성남지원은 1994년 5월 군부대에서 숨진 손모(사망 당시 19세) 이병의 유족이 낸 소송에서 군 의문사 사건으로는 처음으로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을 배척했다.
또 1973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 간첩 혐의로 조사를 받다 숨진 최종길(崔鍾吉) 전 서울대 법대 교수 사건에서도 법원은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을 배척했다.
2009년 서울고법도 선임대원의 가혹행위로 자살한 강모 전경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자살경위조사를 소홀히 한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은 권리남용에 해당된다”면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뉴스토마토 김미애 기자 jiiro@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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