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허예지 기자] 쉬는 날 외출할 때면 커다란 천 가방에 책 세 권을 챙깁니다. 한 권은 소설, 한 권은 사회과학서, 마지막 한 권은 시집입니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들쭉날쭉한 제 비위를 맞추기 위함인데요.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땐 소설을, 생각할 기운이 있을 땐 비문학을, 줄글이 읽히지 않는 날에는 마음을 비우고 시를 읽곤 합니다.
어디를 가든 책을 이고 지고 다니니 애독가라는 오해를 많이 받지만, 그보다는 애서가에 가깝습니다. 손에 단단하게 닿는 표지와 한 장씩 넘어가는 종이의 질감, 그 위에 인쇄된 활자들이 하나하나 어여쁘게 느껴질 때가 많은데요. 책을 통해 얻는 정보만큼이나 책을 구성하는 물리적 요소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제 자신을 소개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런 제게 인공지능(AI)과 책의 관계는 종종 낯설고 껄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지난 1월, 워싱턴포스트 보도를 통해 생성형 AI 챗봇 서비스 '클로드'를 운영 중인 앤트로픽이 자사 AI 학습을 위해 '프로젝트 파나마'를 가동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프로젝트 파나마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중고책을 다량 구매해 유압식 절단기로 해체, 이를 스캔해 AI 학습에 활용한다. 중고책은 적자에 시달리는 도서관에 접촉해 구한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앤트로픽이 해당 프로젝트를 통해 확보한 중고책의 권수는 수백만 권에 달했습니다. 이들은 작가와 출판사의 동의를 받지도 않았고, 해당 프로젝트를 외부에 알리지 않기 위해 내부 단속을 철저히 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북부지방법원은 파나마 프로젝트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작가 지망생이 작가가 되고 싶어 책을 구매하듯, 앤트로픽이 다른 것을 창조하기 위해 '학습'을 했다고 평가한 건데요. 언제나 '종이책의 편'에서 생각하는 저에게는 이 판결이 꽤나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법원의 판단을 존중하더라도, 이번 사례에서 드러난 AI와 책의 관계는 꽤 일방적입니다. 구매하고, 절단하고, 내용을 뽑아내 학습한 건 모두 AI 측. 그 모든 일을 당한 뒤 폐기당한 쪽은 종이책입니다. AI 기술이 책의 영역을 침범한 사례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가령, 최근 국내 모 출판사는 AI를 활용해 연간 9000여권의 책을 펴내 화제가 됐습니다. 고전부터 경제, 인문학까지 다양한 분야를 다뤘지만 전문성이 부족한 내용으로 질타받았습니다. 또 다른 출판사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등 고전 문학을 AI로 번역해 출간하며 맥락상 어울리지 않는 인터넷 신조어를 사용해 비웃음을 사기도 했죠.
이처럼 AI와 책이 맺어온 관계는 다분히 일방적이고, 침습적이며, 착취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책 너머에 책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쏟은 작가와 편집자 등이 있음을 인지하면 그 심각성은 더욱 짙어지고요. 그러나 앞선 판례가 그랬듯, 도서 창작물의 저작권과 생성형 AI 학습의 '안정적 동행'은 아직 요원하기만 한데요. 우리나라에서도 이 꼬인 관계를 풀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저작권위원회는 지난달 25일 '생성형 인공지능(AI)의 저작물 학습에 대한 저작권법상 공정이용 안내서'를 발간했습니다. 해당 자료에는 "헌법상 보호받는 저작권과 AI 기술혁신은 보호와 혁신 중 어느 한쪽을 절대적으로 희생시켜서는 아니 되며, 상생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권리자의 정당한 권리를 존중하고 창작의 동기를 유지하는 동시에, AI 기술혁신을 저해하지 않고 상호 발전과 성장을 진흥할 수 있는 균형점을 찾는 것이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적 과제"라는 제언도 있었고요.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생성형 AI의 발전과 저작권 사이의 줄다리기는 계속될 전망입니다. 클로드의 학습을 위해 스러진 책들을 생각하니, 문득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 설화가 떠오릅니다. 도서관에서 절판된 책 읽기를 좋아하는 저 같은 독자들의 미래는 어떨까요? 종을 만드는 데 아이를 바치고 '에밀레'하는 울음소리만 듣는 어머니처럼, 생성형 AI 안에 녹아든 책의 흔적만을 보게 되는 건 아닐지 우려됩니다.
서울시 용산구에 위치한 헌책방 뿌리서점. (사진=허예지 기자)
허예지 기자 rang@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