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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의 붕괴
입력 : 2026-01-07 오후 3:30:18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전세 냈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전세는 법적으로 내 집이 아니고 소유권은 집주인에게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말에는 지금 이 공간을 사실상 점유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이 말이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세가 더 이상 안정적인 점유를 의미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한 달 동안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에서 심의한 1375건 가운데 664건이 전세사기 피해자로 최종 가결됐습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는 전세사기 피해 주택 4898가구를 매입했고, 이 가운데 4137가구가 전세사기 피해 주택으로 분류됐습니다. 전체 매입 실적의 84%에 해당하는 규모입니다.
 
국토부와 LH는 피해 주택을 신속히 매입하고, 지방법원과 경매 속행 문제를 협의하며 주거 안정을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전세사기로 인한 주거 불안을 공공이 직접 떠안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지점에서 불편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은 위험과 책임의 귀속입니다. 이 기준에서 보면 국가가 전세사기 피해 주택을 직접 매입해 구제하는 방식은 엄밀히 말해 비정상적인 개입입니다. 시장 원리에 따르면 사기 피해는 사법적 구제와 파산 절차를 통해 정리되는 것이 정석입니다.
 
다만 전세사기는 일반적인 투자 실패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정보 비대칭이 극단적으로 컸고, 전입신고와 확정일자, 등기 등 공적 제도가 안전하다는 신호를 제공해왔습니다. 여기에 금융권 대출과 공공 보증이 결합되면서 전세는 사실상 준공공 시장의 성격을 띠게 됐습니다. 개인이 감내해야 할 위험을 국가 제도가 낮춰준 상태에서 집단적 피해가 발생한 것입니다.
 
단기적으로 지금과 같은 전세사기 대책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이 방식이 전세사기 대응의 표준 모델로 굳어지는 순간 정책은 실패하게 됩니다. 임차인에게는 전세가 위험해도 최악의 경우 국가는 구제에 나선다는 인식이 남고, 임대인과 공인중개사, 금융권 등에는 구조적 리스크는 결국 공공이 떠안는다는 학습 효과가 생깁니다.
 
전세사기 물량이 서울·수도권에 집중돼 있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입니다. 서울은 집값이 비싸지만 양질의 일자리, 네트워크와 정보 등 소득과 기회가 집중돼 있습니다. 이 판단이 합리적인 한 서울 집중은 멈추지 않습니다.
 
지방 일자리 정책 역시 같은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공공기관 이전은 지역 소비를 늘렸지만 양질의 민간 일자리를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산업단지는 생산직 위주로 구성돼 청년과 전문직 유입에 한계가 있었고, 혁신도시는 주거 환경은 개선됐지만 일자리는 공공 부문에 머물렀습니다. 이는 부동산 정책의 실패라기보다 산업·노동·지역 정책이 누적적으로 실패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주거비 부담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는 수치로 확인됩니다. 6일 KB부동산 월간 주택가격 동향에 따르면 서울의 월세지수는 131.2로, 지난해 1월 120.9에서 10.3포인트 상승해 관련 통계가 집계된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습니다. 목돈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주거를 담보하던 전세가 사라질수록, 일반 국민들은 매달 비싼 월세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전세 냈냐'라는 말에는 이 공간이 지금만큼은 나의 자리라는 믿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세가 더 이상 점유의 안정성을 보장하지 못하는 순간, 이 말도 의미를 잃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주거 형태의 변화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주거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종합적인 해법 없이 전세사기 구제에 머무는 대응만으로는 이 불안을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일자리와 기회가 서울에 집중된 이른바 '서울 공화국'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같은 문제는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세의 붕괴는 이미 진행형입니다.
 
6일 서울 강남구에서 한 공인중개사가 부동산 매물을 붙이고 있다. 같은 날 KB부동산 월간 주택가격 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서울 아파트 월세지수는 131.2로 통계 작성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사진=뉴시스)
이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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