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교통사고를 당한 뒤 가장 황당했던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가해자가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보험사는 상대방 과실이라고 분명히 설명했고, 보험금도 지급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사고가 나서 미안하다'는 말은 끝내 들을 수 없었습니다. 사고로 몸과 마음이 상처를 입은 상황에서 사과 한마디 없이 사건이 마무리됐다는 점이 오래도록 찜찜하게 남았습니다.
돌이켜보면 한국 사회에서는 사과가 곧 '내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사과를 하는 순간 법적·도덕적 책임을 떠안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작동합니다. 결국 먼저 사과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국룰'처럼 굳어졌습니다. 인간적인 말 한마디보다 법적 유불리가 앞서는 문화가 만들어낸 씁쓸한 풍경입니다. 이렇다 보니 한국 사회에서 사과를 받는다는 일은 유난히 각별하게 다가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사과는 인상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 대통령은 29일,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1주기를 맞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책무를 가진 대통령으로서 깊은 사죄의 말씀을 올린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책임져야 할 곳이 분명히 책임을 지고, 작은 위험일지라도 방치하지 않는 모두가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사과가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는 대통령 본인이 직접 초래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 태도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정상적인 국가의 언어'처럼 느껴졌습니다. 비정상이 일상이었던 사회를 오래 겪어왔기에, 설령 입바른 말일지라도 뿌듯하고 믿음직하게 들렸습니다.
반면 같은 시기, 3370만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쿠팡 사태에서 나온 사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남겼습니다. 김범석 쿠팡 Inc 이사회 의장은 사고 발생 한 달 만에 본인 명의의 첫 공식 사과문을 내고 "개인정보 유출 사고로 고객과 국민들께 큰 걱정과 불편을 끼쳐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며 "이사회를 중심으로 한국 쿠팡이 보상안을 마련해 조속히 시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시장과 소비자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김범석 의장이 국회 6개 상임위원회 연석 청문회 불출석 의사를 밝힌 직후 나온 사과였기 때문입니다. 책임의 자리를 피한 채 발표된 사과와 보상은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쿠팡은 1인당 5만원씩, 총 1조6850억원 규모의 보상안을 발표했습니다. 국내 기업의 소비자 피해 보상으로는 사상 최대 수준이지만 그 내용 역시 논란을 키웠습니다. 현금이 아니라 쿠팡 로켓배송 5000원, 쿠팡이츠 5000원, 쿠팡트래블 2만원, 알럭스 2만원 등 네 가지 이용권으로 구성됐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시 쿠팡의 상품을 구매하라는 방식입니다. 특히 쿠팡트래블과 알럭스는 여행상품과 명품을 취급해, 2만원 쿠폰을 쓰기 위해서는 훨씬 더 큰 지출이 필요해 마케팅 아니냐는 반응이 나오기도 합니다.
같은 '사과'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두 장면이 주는 무게와 품격은 확연히 다릅니다. 한쪽은 본인 기업에서 벌어진 사고임에도 책임의 자리에 서지 않으려 하고, 다른 한쪽은 본인이 직접 하지 않은 일임에도 국가의 최고 책임자로서 책임을 짊어지겠다고 말합니다. 대통령의 사과가 잘했고 기업의 사과가 못했다는 단순한 비교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명 사고를 겪은 사회의 최고 책임자와, 노동자 사망사고에 더해 전국민 규모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를 일으킨 기업의 경영진을 나란히 놓고 볼 때, 책임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나는 간극이 씁쓸하게 남습니다.
29일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건물 앞에 걸린 쿠팡 규탄 현수막. (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