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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은행 창구, 막힌 자금줄
입력 : 2025-11-07 오후 3:18:07
[뉴스토마토 이재희 기자] 은행권이 대출의 문을 사실상 걸어 잠그고 있습니다. 최근 일부 은행은 '지점당 주택담보대출(주담대) 월 10억원 제한'이라는 초강수를 뒀습니다. 지점 한 곳당 대출 두세 건이면 한도에 도달한다는 뜻입니다. 금융당국의 총량관리 압박이 거세지면서 실수요자와 서민층이 가장 먼저 벽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은행 창구에서는 "이번 달은 이미 한도 다 찼다"는 말이 일상처럼 들립니다. 대출상담사들도 손발이 묶였습니다. 신한은행은 대출모집인을 통한 신규 접수를 중단했고, 농협은행은 11월 실행분이 조기 소진돼 12월 배정분만 검토 중입니다. 하나은행 역시 11월분은 이미 끝났고 12월분만 남았습니다. 우리은행은 영업점별 주담대·전세대출 한도를 월 10억원으로 묶고 입주자금대출 한도도 줄였습니다. 국민은행도 내부적으로 대출 총량 관리 강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같은 조치는 지난 6·27 부동산 대책 이후 하반기 가계대출 총량 목표가 기존의 절반으로 축소된 데 따른 것입니다. 이미 일부 은행은 연간 목표치를 초과했습니다. 여기에 금융당국이 주담대 위험가중치 상향(15→20%) 시점을 내년 4월에서 1월로 앞당기면서 은행의 대출 여력은 더 위축된 상황입니다. 위험가중치가 오르면 자기자본 대비 대출 여력이 줄어드는 만큼 은행은 방어적인 포트폴리오로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
 
은행은 이익을 따져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리스크 대비 수익이 낮은 가계대출보다는 기업대출이나 우량 신용고객 중심으로 자산을 재조정하는 게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조정의 여파는 고스란히 실수요자에게 전가됩니다. 결혼을 앞두고 신혼집을 마련하려던 30대, 전세 만기를 앞둔 세입자, 주거 이전을 계획한 맞벌이 부부들이 가장 먼저 '대출 절벽' 앞에서 발길을 돌리고 있습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달 들어 주담대 문의가 폭주하지만 실제 실행 가능한 건은 많지 않다"며 "본점에서 내려온 총량 한도 지침을 어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대부분 시중은행들은 대출을 막는 게 아니라 분기별 여력을 나눠 관리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사실상 '창구 마감' 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로 인해 풍선효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은행권 문이 닫히자 저축은행, 캐피털, 상호금융 등 제2금융권으로 대출 수요가 이동하고 있습니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6·27 부동산 대책 이후 8월까지 저축은행의 개인 자동차담보대출 신청은 하루 평균 5600여건으로 이전보다 150% 증가했습니다. 금리가 더 높은 2금융권으로 몰리면서 저신용자나 소상공인의 이자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습니다.
 
고강도 대출 규제가 장기화하면 자영업자나 취약차주들이 대부업이나 불법사금융으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금융당국이 단순한 총량 규제 대신 자금 수요의 질을 구분해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실제로 최근 시중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9월 말보다 1조5000억원 이상 늘었지만, 증가분의 상당수는 신용대출이었습니다. 주담대는 제자리걸음이거나 감소세입니다. 이는 실수요자가 주택자금을 확보하기 어려워졌다는 뜻입니다.
 
은행들은 위험관리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항변합니다. 하지만 금융소비자 보호 측면에서 보면 이는 과잉 대응에 가깝습니다. 실수요자와 취약계층의 숨통까지 막는 방식의 조정은 금융의 사회적 책임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가계부채 관리라는 명분 아래 시장을 억누르는 정책이 지속된다면, 금융은 본연의 기능인 자금중개 역할을 잃게 될 것입니다.
 
대출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생계와 삶의 문제입니다. 실수요자가 접근 가능한 합리적 대출 구조를 만들지 못한다면, 정부의 부동산·금융정책은 공허한 구호에 그칠 것입니다. 금융당국은 총량이 아니라 '대출의 질'을, 은행은 리스크가 아닌 '금융의 역할'을 고민해야 합니다.
 
서울 한 시중은행에서 고객이 창구를 이용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재희 기자 nowhee@etomato.com
이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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