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희 기자] 은행의 부동산 자체 감정 논란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KB국민은행이 산정하는 'KB시세'가 금융권 전반의 담보대출 기준으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감정평가사협회와 정부 부처가 제도적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면서 논란은 제도 충돌의 국면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문제의 시작은 명확합니다. '은행이 스스로 감정평가사를 고용해 담보물을 평가하는 것이 과연 법적으로 허용되는 행위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판단입니다. 이에 대해 감정평가사협회는 "은행이 감정평가법인의 인가 없이 사실상 감정평가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협회에 따르면 국민은행의 자체 감정평가 규모는 2022년 26조원에서 올해 75조원까지 급증했습니다.
감평협은 국민은행이 고액 부동산 위주로 자체 평가를 진행해 감정평가 시장을 사실상 침탈하고 있다며 은행이 감정평가법인 인가도 없이 '감정평가'를 수행하는 것은 위법 행위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실제 감정평가법 제5조 제2항은 금융기관이 대출 등과 관련해 토지·건물의 감정평가를 하려면 감정평가법인 또는 감정평가사에게 의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가받지 않은 기관이 자체적으로 감정평가를 수행할 경우, 같은 법 제49조 제2호에 따라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국토교통부 역시 감평협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국토부는 최근 "은행이 감정평가사를 직접 고용해 담보물을 평가하는 행위는 감정평가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행정 해석상 사실상 위법 가능성을 공식 인정한 것으로 금융권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반면 금융위원회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금융위는 "감정평가법과 은행업 감독업무 시행세칙이 충돌하고 있는 만큼 관계기관 협의를 통해 개선 방안을 마련 중"이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제도 개선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어느 한쪽의 법률 해석을 우선시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은행권은 강하게 반박하고 있습니다. 은행들은 자체 감정은 세칙상 적법하며 명확한 시세가 존재할 경우 자체 평가를 허용한다는 규정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담보를 외부 감정평가법인에 의뢰할 경우 건당 20만~40만원의 수수료가 발생해 결국 차주에게 비용 부담이 전가된다는 논리입니다. 또한 자체 감정은 대출 실행 속도를 높이고 업무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현실적인 제도라는 입장입니다.
결국 이번 논란의 본질은 '제도 간 충돌'에 있습니다. 감정평가법은 공공성을 기반으로 한 전문 평가 체계를 강조하지만, 은행업 감독세칙은 금융거래의 효율성과 신속성을 우선합니다. 한쪽은 공공성, 다른 한쪽은 실효성을 내세우며 충돌하는 구조입니다. 문제는 이 충돌이 10년 넘게 반복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2011년 금융권이 담보 설정 비용을 부담하게 된 이후부터 은행의 자체 감정 논란은 계속 이어져왔습니다.
이번 사안을 계기로 제도 간 경계를 명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금융의 신뢰는 투명한 기준에서 비롯됩니다. 은행이 효율을 이유로 감정평가의 공공 기능을 대체한다면, 시장의 신뢰 기반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제도 개선 없이 모든 평가를 외부에 의존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감평협과 금융위, 국토부, 국민은행 간 4자 협의체가 합리적인 협의안을 도출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한국감정평가사협회 소속 회원들이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앞에서 2차 규탄집회를 열고 있다. (사진=한국감정평가사협회)
이재희 기자 nowhe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