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휴머노이드 로봇은 실험실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미리 짜인 시나리오를 따라 걷고, 물건을 집고, 손을 흔드는 정도의 동작은 가능했지만 환경이 조금만 바뀌어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처럼 상황을 읽고 반응하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대언어모델(LLM)이 로봇의 두뇌로 자리 잡으면서 판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 로봇은 명령을 해석하고 맥락을 파악하며 스스로 판단해 행동합니다.
이 변화는 단순한 기술 진보가 아니라 로봇의 존재 방식 자체를 재정의한 전환점입니다. 과거에는 통제된 환경에서의 시연이 전부였다면, 이제는 현실 공간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고 빠르게 작동하느냐가 핵심 경쟁력이 됐습니다.
최근 공개된 피규어 AI의 신형 휴머노이드 '피규어03'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피규어 AI가 공개한 영상 속 피규어03은 화분에 물을 주고, 세탁기에 빨래를 넣어 가동하고,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정리하고, 건조가 끝난 빨래를 개어 정돈하기까지 합니다. 하나하나의 동작이 가사 노동을 체득한 듯 유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산업 현장과 서비스 영역 전반에서 인간의 손과 어깨를 대신할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현재 휴머노이드 경쟁의 중심축은 미국과 중국입니다. 두 나라는 이미 기술·부품·운영이 결합된 산업 생태계를 갖추고 피지컬 AI 전문 인력을 빠르게 확보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은 이제야 각 부처가 지원 프로그램을 내놓으며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로봇 개발 전 과정을 수행할 역량을 갖춘 기업은 드물고 로봇과 AI 융합을 주도할 인재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휴머노이드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상상이 아닙니다. 인간의 일상과 산업 현장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 사회와 노동의 지형이 근본적으로 재편될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술 그 자체보다 그 기술을 현실로 구현할 통찰과 인재입니다.
지난 9월 서울 강서구 코엑스 마곡에서 열린 제1회 산업 AI EXPO 에이로봇 부스에서 4세대 휴머노이드 로봇 앨리스 작동이 시연되고 있다. (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