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중학교 2학년, 짝사랑하던 남자아이와 다시 같은 반이 됐습니다. 한 반을 썼던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이어져온 마음이었습니다. 어떤 점이 그리 좋았느냐 묻는다면 ‘츤데레’ 같은 성격이라고 답하겠습니다. 친구들과 있을 때는 ‘조폭 마누라’와 같은 말로 저를 짓궂게 놀렸지만, 둘이 있을 때는 한 없이 다정했습니다. 애석하게도 그 한 번을 끝으로 늘 다른 반에 배정됐습니다. ‘이제 그만 마음을 접을까’ 하다가도, 종종 오는 메시지와 복도에서의 짧은 장난이 죽어가던 감정에 심폐소생술을 해댔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중학생이 되어 다시 한 교실을 쓸 기회가 생긴 겁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어떻게 관계를 쌓아갈지 고심했습니다.
날벼락같은 소문은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날 무렵 들려왔습니다. 그 애가 우리 반 여자 아이와 썸을 타고 있다고. 교실에서 둘이 대화하는 모습을 자주 보기는 했지만, 방과 후에도 만나며 연락을 이어가는 사이인 줄은 몰랐습니다. 5년간 닿지 못한 그 벽을 그 친구는 어떻게 3개월 만에 허문 걸까…. 그 무렵부터,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성이 좋아 누구와도 두루두루 잘 지내는 친구였습니다. 칫, 성격이 둥근 사람을 좋아하는 건가. 호기심에 말을 걸어보니, 또래와는 다르게 어른스럽고, 묘한 안정감을 주는 친구였습니다. 그렇게 그 애를 알아가며 ‘짝사랑 상대의 마음을 얻은 비결’을 찾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허무하게도 이 프로젝트는 2학기에 들어서며 중단됐습니다. 그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겁니다. 옆 반에 아주 예쁘다고 유명한. 저는 전의를 상실해 감정을 정리하게 됐습니다. 엉뚱하게도 관찰 대상이었던 여자아이와의 친분은 두터워졌습니다.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해 인연을 이어갔고, 대학생이 된 후에도 종종 만났습니다. 졸업 이후로는 왕래가 없었는데, 최근 연락이 닿아 점심식사를 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하는 일은 괜찮은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다 예전엔 미처 몰랐던 이 친구의 장점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늘 누군가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싶었습니다. 비슷한 경험을 꺼내 공감하거나,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하며 애썼지만, 충분하지 못했다는 찜찜함이 늘 남곤 했습니다. 이 친구의 대화 방식은 달랐습니다. 제 말을 진중하게 들어주던 그녀는 “그 상황에서 제일 힘들었던 게 뭐였어?”,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괜찮아질 것 같아?”와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 물음에 답하며 감정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자 가슴이 확 트였습니다. 그 이후 들은 “너무 힘들었겠다”는 한마디는 그 어떤 위로보다 깊이 와닿았습니다. 그제야 진정한 위로는 경청과 질문에서 온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랫동안 미해결로 남아 있던 퀘스트가, 마침내 완료된 느낌이었습니다. 짝사랑했던 남자아이의 마음은 얻지 못했지만, 이제 저는 더 많은 사람들과 사랑을 할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박혜정 기자 sunright@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