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뉴스를 보면 항상 언급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정쟁'입니다. 사전에서는 정쟁을 '정치에서의 싸움' 또는 '정계 투쟁'이라고 풀이합니다. 한자로는 '정사 정(政)'에 '다툴 쟁(爭)'을 씁니다.
지난달 7일부터 시작해 오늘(1일) 막을 내린 2024년 국정감사에서도 '정쟁'은 화두였습니다. 야당은 공천 개입,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등 김건희 여사 관련 온갖 의혹을 캐물었습니다. 여당은 이재명 사법 리스크를 언급하며 방어에 나섰습니다.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경우, 김건희 여사의 '코바나 콘텐츠' 관련 업체 밀어주기 의혹을 둘러싼 여야 간 공방으로 개시 20분 만에 국감이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여당인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당 국정감사 대책 회의에서 "방탄용 정쟁 국정감사를 마무리하자마자 정쟁 예산심의를 예고했다"며 민주당을 직격했습니다.
국민은 정쟁에 지친 상황입니다. 민생을 위한 건전한 토론이 아닌 막말과 고성에 한숨을 내쉽니다. 여론조사 전문 회사인 한국갤럽이 10월 29~31일 사흘간 전국 만 18세 이상 1005명을 대상으로 올해 국감 성과에 대해 물은 결과 전체의 51%가 '성과 없었다'고 답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상대 비방·정쟁·싸우기만 함'이 21%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지난달 30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주최로 개최된 '2024 국정감사 평가와 제도 개선 토론회'에서도 민생을 뒷전으로 둔 정쟁이 국감 효과를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제기됐습니다.
이제 국민은 정쟁 두 글자만 봐도 고개를 젓습니다. 그러나 의문이 듭니다. 정치에서 갈등이 없을 수 있을까요. 정쟁 자체가 없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비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 속 중앙정부 권력은 비대해져 갈 것입니다. 권력 지향적인 아첨꾼들이 판을 치며 자기 잇속만 챙길 가능성이 큽니다. 역사적으로 왕권에 집중된 시대나 민주화 전 군사독재 정권 시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헌법에 의해 정당 가입 및 집회·결사 자유가 보장된 이유도 이 때문이죠. 각 계급 간 정치적 투쟁과 갈등 속 타협이 사회를 건전한 방향으로 이끈다고 합의한 것입니다.
물론 민생을 외면한 정쟁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정쟁이란 단어 역시 프레임 전쟁 속 하나의 무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프레임은 사람이 생각하는 기본 틀(방식)을 의미합니다. 정쟁 프레임은 기득권에서 많이 사용합니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정부와 여당은 야당 또는 정책 반대 세력을 향해 "민생을 외면하고 정쟁을 일삼으며 발목만 잡는다"고 책임을 돌립니다. 국민에게 부정적 느낌을 먼저 주는 '정쟁'을 상대에게 프레임 씌워 민심을 바꾸는 정치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 전략이라고 볼 수 있죠.
국민 스스로가 프레임 뒤 진실을 가려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양한 정보를 통해 누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누구와 정치적 갈등이 있었는지 속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정치권에서의 권력 이동은 늘 프레임 전쟁 가운데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빨갱이, 한남, 꼰대 등 얼마나 많은 단어가 그동안 우리 곁을 맴돌며 갈등을 부추겨왔나요. 지금 이 순간도 이러한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특정 프레임이 사회를 엉망으로 뒤흔들어 놨지만, 때로는 언어가 가진 상징성으로 모인 여론이 가려졌던 사회 문제를 환기시키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무비판적으로 프레임 전략에 자주 반복 노출될 경우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 한쪽 편을 들고 상대를 공격하게 돼 갈등 골이 깊어진다는 점입니다.
'건강한' 정쟁은 필요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투쟁도,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행위도 모두 민주 사회를 지탱시키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아닌, 그 가족 또는 정치 브로커가 국정을 농단한다는 정황이 포착됐을 때 제 2 정치권력인 야당이 막아서지 않으면 누가 그 역할을 할까요. 정부가 책임을 다하지 못해 발생한 이태원 참사나 채상병 순직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없다면 국민은 누굴 믿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갈등을 피하고자 이러한 문제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참된 정치일까요.
과거에도 정쟁은 있었습니다. 고려 말기부터 조선시대 언론 활동을 비롯해 풍속 교정, 백관에 대한 규찰과 탄핵 등을 관장하던 관청 '사헌부'는 임금이 정사를 잘못할 시 대궐 뜰에 서서 간쟁을 벌였습니다. 임금 면전에 대고 옳고 그름을 논쟁한 것이죠. '조정 정(廷)'에 '다툴 쟁(爭)'을 쓴 '정쟁'입니다. <태종실록>에서는 사한부가 상소하는 것을 두고 "옛 사람이 면절하고 정쟁하고, 견거하고 절함한 것도 또한 죽음으로써 간쟁한 것이었느니, 그 마음을 따져 보면 모두 임금을 사랑한 것이었다"고 나옵니다. <세종실록>에서는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 등이 일을 전폐하고 임금 친·인척 주변을 맴도는 무리들을 청탁죄로 탄핵해야 한다고 정쟁했다는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
조상들의 지혜에서 알 수 있듯 정쟁 기본은 '존중'입니다. 정쟁을 하더라도 폭력성이 없어야 합니다. 갈등이 있더라도 대화와 타협의 끈을 놓으면 안 됩니다. 사헌부가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쟁했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국민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유명세를 얻기 위해 정쟁을 벌여선 안 됩니다. 국민을 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필요한 순간에는 정쟁 프레임을 뚫고서라도 할 말은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법이 가장 보호해야 할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함께 하기 위해서라면 권력자와의 갈등을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정쟁 없이 권력에만 빌붙는 행위야말로 저질 정치입니다.
정치권에서의 프레임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정쟁 vs 민생' 프레임 뒷이야기에서 선악을 가려내는 것은 안타깝게도 국민 몫입니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지난달 18일 열린 국정감사 대책 회의에서 발언하는 모습. (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