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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의 밴드유랑)글렌체크, 전자음으로 빚은 '앨리스 세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콘셉트 각색한 새 EP '펄프’
입력 : 2023-07-06 오전 12:00:00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관능적으로 쪼그려 앉은 눈이 세 개 달린 토끼 탈. 온갖 상술로 앨범 커버를 예쁘장하게만 장식하려는 시대에 이렇게도 투박하고도, 외설적이며, 괴기한 그림을 박제해둔 이유는 무엇일까.
 
"무섭더라도 따라가게 되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질 수 있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어요. '제 3의 눈'을 떠서 새로운 것을 깨닫는 토끼, 괴물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이 지닌 편견과 생각의 껍데기를 벗겨내겠다는 속뜻이 있습니다."(김준원)
 
근 3인 체제(김준원·강혁준·제이보(zayvo))로 재편한 일렉트로닉 그룹 '글렌체크(Glen Check)'가 낸 새 EP '펄프(Pulp)'. 사진=EMA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등장하는 회중시계를 든 토끼가 이렇게도 색칠될 수 있다는 것. 최근 3인 체제(김준원·강혁준·제이보(zayvo))로 재편하고 새 EP '펄프(Pulp)'를 낸 일렉트로닉 그룹 '글렌체크(Glen Check)'는 "고충과 생각에 잠식돼 실제 도전이나 행동에 나서지 않는 한국 대다수 젊은이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 쳇바퀴 돌아가듯 살지 않겠다는 포부를 음악에 담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글렌체크는 한국 대중음악 일렉트로닉 분야에서 세련된 감각으로 평단과 대중을 모두 사로 잡고 있는 팀입니다. 2011년 데뷔, 대표곡 '60 카르뎅(Cardin)'이 실린 앨범 '오트 쿠튀르'로 2013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음반 부문을, 2014년 같은 시상식에서 앨범 '유스(YOUTH)'로 같은 부문을 받는 등 음악성을 인정 받아왔습니다. 지난해 9년 만에 발표한 정규 3집 ‘블리치(Bleach)’ 역시 같은 시상식 '최우수 일렉트로닉 - 노래/음반' 후보에 올랐습니다. 국내외 최대 규모 페스티벌 무대에 서면, 수만명의 관중들이 이들의 음악에 맞춰 합동율동을 하거나 기차놀이를 하는 진풍경도 펼쳐집니다.
 
최근 3인 체제(김준원·강혁준·제이보(zayvo))로 재편하고 새 EP '펄프(Pulp)'를 낸 일렉트로닉 그룹 '글렌체크(Glen Check)'. 사진=EMA
 
새 EP의 제목 '펄프'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펄프 픽션(Pulp Fiction)'에서 따온 것. "글로벌 인터넷 백과사전(어번 딕셔너리)을 뒤져보면 은어나 슬랭으로 쓰이는데요. 잔인하거나 충격적인 사건을 다루지만, 별거 아닌 것처럼 표현하는 책이나 영화를 가리키죠. '펄프스럽다' 하죠.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는 대체로 유머러스한데 뜯어보면 잔인한 역설이 있어요. 그런 이미지적 상상을 입혀보려 했어요."(김준원, 강혁준)
 
2000년대 초반 틴팝을 연상시키는 록 장르의 타이틀곡 ‘Candy Pink’는 전작('블리치')과 연결선상에 있는듯한 느낌을 줍니다. E계열의 록스러운 코드를 중심으로 프리즘처럼 펼쳐내는 전자음악 선율들은 역시나 ‘한국의 다프트 펑크’. "남자의 찐따성을 극대화한 곡이죠. 센척하는데 안에서는 겁먹고 있는 심리라든지. 이성 관계에 있어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걸 없음을 알게 되는 진따성은 사실 매력적인 거죠. 그걸 예쁘게 표현한 거예요."
 
베이스라인이 인상적인 사이키델렉 디스코풍의 다른 수록곡 ‘Cactus, Cactus(선인장, 선인장)’에서는 최근 두아 리파 같이 영미권 시장에서 뜨는 복고풍 리듬들을 세련되게 각색한 지점들이 엿보입니다. "핑크플로이드의 'another brick in the wall'을 좋아했는데 그런 그루브가 나오더라고요. 공기 중 수분으로도 잘 살아가는 선인장을 끝없는 욕심에 빠진 인간과 비교한 겁니다. 자신을 포장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디스 곡입니다."
 
최근 3인 체제(김준원·강혁준·제이보(zayvo))로 재편하고 새 EP '펄프(Pulp)'를 낸 일렉트로닉 그룹 '글렌체크(Glen Check)'. 사진=EMA
 
철컥 거리는 기타 사운드가 조이 디비전 같은 옛 영국 포스트펑크처럼 들리는 ‘Mind Surfing’는 소셜미디어(SNS)의 허세와 가짜 인생을 비판한 곡. 흐느적거리는 몽환적인 무드의 드림팝 ‘Teen Dream’이 앨범의 문을 닫습니다. "어릴 적에는 서서히 꿈이 깨져가는 경험을 누구나 하잖아요. 특별했 꿈을 꾸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닌 상황이 되는…. 그렇지만 그보다는 내가 원하는 길로 재밌게 살다보면 어떨까 생각해봤어요. 미래에 대한 불필요한 걱정과 생각은 접어두고."
 
이번 음반은 음악은 물론이고 음반 커버와 뮤직비디오까지 멤버들이 직접 DIY로 제작했습니다. 데뷔 13년차에 스스로의 음악 세계를 더 잘 표현하려 영상과 촬영까지 독학으로 배워 감행했다고. "집에서 형광등 켜고 저희 얼굴 스캔만 뜨고 컴퓨터로 옮겨서 3D로 작업해보기도 했고요. 창의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만 명확하다면 돈이든 시간이든 다른 조건들 다 떠나서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오는 9월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리는 '리퍼반 페스티벌'이 예정돼 있습니다. 독일을 시작으로 유럽과 동남아 등의 몇개 도시도 돌 예정입니다. 
 
13년 전 연남동 반지하 건물, 햇빛도 들어오지 않던 곳에서 투닥거리며 음악하던 청년들은 이제 양지(陽地)의 어느 곳을 상상합니다.
 
"외주나 제작비도 거의 안썼고 우리가 이렇게 음악을 DIY로 만드는 게 잘만 전달하면 누군가에겐 용기가 되겠다 생각했거든요. 금수저가 아니라서 못한다거나 뭔가 시작하기 늦었다는 핑계를 대며 꿈을 이룰 수 없다고 합리화하는 이들의 생각을 깨고 싶었어요. 이번 앨범은 무조건 집에서 들어주세요. 생각보다 자신에 관한 모든 게 다 있을 거거든요. 거기서 시작하면 돼요."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권익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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