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한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가고 있는 '뉴진스 신드롬'. 대중음악계에서 보는 성공의 핵심은 아주 역설적입니다. '탈 K팝'. 기존 K팝 성공 방정식에 새로운 상수값을 투입시킴으로써, 판도 자체를 바꿨다는 겁니다. 업계에서는 '포스트 K팝'이란 말로도 현 뉴진스 신드롬을 분석하는 분위기입니다.
지난해 데뷔한 그룹 뉴진스는 시작부터 기존 K팝 아이돌 그룹들과는 차별화된 행보를 보여왔습니다. 다른 홍보 일체 없이 팀명, 멤버 구성, 데뷔 일자를 공식 뮤직비디오를 통해 한 번에 공개하면서 화제 중심에 섰습니다. 하이브 자회사 어도어(ADOR)가 제작한 그룹. 평균 나이 17세, 한국·베트남·호주 출신으로 구성된 다국적 멤버들로 구성됐습니다.
지난 20년 간 K팝 산업에서 일해온 민희진 대표가 팔을 걷어 붙이고 전면에 나서서 이들을 제작했습니다. 민 대표는 SM엔터테인먼트 재직 시절 소녀시대 콘셉트 기획을 시작으로 f(x), 레드벨벳, 샤이니 등의 비주얼 디렉팅으로 독특한 시각 이미지를 입혀온 인물입니다.
지난해 데뷔한 그룹 뉴진스는 시작부터 기존 K팝 아이돌 그룹들과는 차별화된 행보를 보여왔다. 사진=어도어
핑클, S.E.S 같은 90년대 걸그룹이나 이와이 슌지의 영화 색감처럼 몽글몽글한 영상미, 8mm 캠코더와 긴 생머리와 네일, 팔토시 스타일링. 뉴진스가 촉발한 Y2K 열풍(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유행하던 세기말 감성)은 지난해 여름부터 올해 겨울까지, 음악과 패션, 광고업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 신드롬이 뒤늦게 해외까지 번져 미국 빌보드 차트까지 영향을 주는 분위기가 감지됩니다.
최근 3주 간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핫(HOT) 100'에 3주 연속 두 곡('ditto', 'OMG')을 동시에 올렸습니다. 이 차트에 한주 내 2곡 이상 올린 K팝 그룹은 방탄소년단(BTS)과 블랙핑크에 이어 뉴진스가 세 번째인데, 미 현지 홍보가 일체 없었음에도 그 기간마저 단축시켰다는 데서 의미가 큽니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는 "팬덤 화력을 중심으로 차트에 이름을 올리던 기존 K팝과 뉴진스의 차트 진입 방식은 조금 다른 구석이 있다"며 "K팝 팬덤의 핵심이 되는 유색인종 뿐 아니라, 빌리 아일리시나 두아리파 같은 미국의 이모키드나 현대 팝을 즐겨듣는 청중들이 자발적으로 찾아듣는 기존과는 다른 움직임이 있다. 기존의 K팝이 미국에서 성공했던 것과는 또 다른 방식의 성공 모델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뉴진스 신드롬의 핵심은 '탈 K팝'이라는 역설로 정리됩니다. 일단 음악 제작 방식부터가 그렇습니다. 그간 한국 대중음악신에서 두각을 보인 '고유의 색깔'을 지닌 장르 음악가들을 대거 수혈한 점이 특징.데뷔작부터 프로듀싱에 나서고 있는 DJ 250을 비롯해 검정치마와 우효 등이 노랫말을 거드는 등 기존 K팝 작법과는 다른 시도들을 해오고 있습니다.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주도하는 그룹 뉴진스는 별다른 세계관 없이 90년대 Y2K 정서를 연상시키는 감각적인 디자인과 콘셉트에는 특히 40대 중년 팬들이 열광했다. 해당 사진은 팬들과 소통하는 앱 이미지. 사진=어도어
‘맥시멀라이즈’, 즉 음압과 음량, 음향 효과등을 모두 꽉꽉 때려넣는 케이팝 사운드의 표준을 버렸습니다. 과도한 이펙트를 걸지도 않고, 물흐르듯 흘러가는 UK개러지나 잘게 잘린 볼티모어 댄스뮤직 비트를 차용합니다. 채우기보다는 비우는 음악, 듣기 편한 공(空)의 미학.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는 "K팝은 그룹의 이미지와 기획 단계에 맞춰 보통 스토리텔링을 짜는 편인데, 뉴진스는 K팝 시스템 안에서도 장르 뮤지션들(BANA 소속 아티스트 등)에게 선택지를 맡기는 개념에 충실한 것으로 보인다"며 "맥시멀하거나 급격한 구간 변경, 억지 랩이나 고음 파트가 없고 코드 변화 또한 기존 K팝에 비해 다양하지 않아 듣기에 편안한 느낌을 준다"고 봤습니다.
음악 외적으로도 광고와 영화 제작으로 최근 각광받는 제작사와 합작해 '슌지풍 뮤직비디오'를 만들거나, 10~20대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 30~40대까지 아우를 수 있는 보편성 또한 인기 요인입니다. 김작가 평론가는 "한국대중문화계의 크리에이터들, 특히 상업적 분야에서 자기 색을 확실히 내는 이들을 포섭해 새로운 무브먼트를 만들었다고 본다"며 "어른들이 만들어 낸 인위적 세계관이 아닌, 멤버들 자연스러움을 끌어낸 기획자와 전달자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새롭게 보여준 현상"이라고 봤습니다.
다만 뉴진스 역시 지난해 '쿠키' 가사 논란의 선정성과 관련해(여러 작곡가들의 협업으로 가사 검수가 제대로 안돼) 몸살을 앓았던 만큼, K팝 제작 시스템의 테두리를 완벽하게 벗어난 것은 아니란 지적도 있습니다.
지난해 데뷔한 그룹 뉴진스는 시작부터 기존 K팝 아이돌 그룹들과는 차별화된 행보를 보여왔다. 앨범 재킷으로 활용된 상징적 토끼모양. 사진=어도어
그래도 어쨌든 이른바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처럼 공장식으로 찍어내던 기존 K팝으로부터의 새로운 변모라는 것. K팝이라는 거대한 용어 아래 숨겨져있던 보석 같은 다양한 장르 음악이 K팝과 결합하면, 거대한 '하이브리드 K팝'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뉴진스가 이끄는 '포스트 K팝'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도헌 평론가는 "그간 레드벨벳이나 청하 음악에 각각 수민이나 검정치마가 참여하는 식으로 장르음악가들이 고유의 색깔을 입혀온 시도들은 많았지만 이전까지는 '참여의 단계' 정도였다"며 "뉴진스 신드롬 이후, (대형기획사와 장르음악가들에게) 서로 창작의 자율권을 어느정도까지 부여할 것이냐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엔 개별 곡 작업보다도 뉴진스만큼 음악과 스타일링, 이미지, 퍼포먼스를 어떻게 합일시킬지 조율하는 최종 기획자와 전달자의 역량 또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