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세상이 몰라준다고 여길 때
공자는 대표적으로 공부가 즐겁다고 한 스승이다. 어떻게 책임지시려고 이런 엄청난 말을 했을까. 사실 공자의 이 말이 어떤 뜻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 이 말은 지금까지 "공부하고 때때로 이를 다시 익히면 기쁘지 않은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공자가 이런 뻔한 말을 했을까? 이 구절에 대한 다른 해석의 실마리는 바로 '익힐 습(習)' 자에 있다. '습(習)'이라는 글자에는 본디 '겹친다'는 뜻이 있다. 갑골문 '습(習)' 자를 보면 데칼코마니 모양의 이 글자의 원형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나는 '데칼코마니 습자'라고 부르고 싶은 글자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란 공자의 말에서 '습(習)'이라는 글자를 '겹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뜻이 달라진다. "공부한 것이 때때로 삶을 살아가는 실천과 데칼코마니처럼 포개어지면"이란 뜻이 된다. 예를 들면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다'라는 말을 배워서 그대로 살았더니 과연 그 말씀이 맞았고(앎과 삶이 데칼코마니처럼 포개지더라), 그리하면 기쁨이 더할 나위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배움과 실천이 겹쳐지는(일치하는) 사람은 벗<동지, 붕(朋)>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라는 표현 다음에 "벗(동지)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란 구절이 뒤따르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남이 자신을 몰라주더라도 화가 나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
모르는 것은 빈칸으로 남겨두라
공자의 공부는 즐거움을 위한 공부다. 그렇기에 '나를 위한 공부'라고 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공자의 명언 중에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는 말이 있다.
좋아서 하는 공부를 하게 되면 모르는 것도 흠이 아니다. 오히려 "모르는 것을 빈칸으로 남겨두는 것이야말로 군자가 해야 하는 일이다"라고 공자는 말했다(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子路>) 우리는 모르는 것을 종종 수치스럽게 여긴다. 무지를 감추려고 한다. 왜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일까. 자신이 아닌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를 위한 공부를 하게 되면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해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공부에 발전이 있다. 무엇을 아느냐보다 무엇을 모르느냐가 공부가 깊어지는 과정에서 훨씬 중요하다. 공자의 다음 말을 음미해보자.
"나는 역사 기록자들이 확정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역사가가 글을 비워두고, 조련이 안 된 말이 있으면 능숙한 사람에게 말을 빌려주어 말을 타도록 하여 조련을 시키는 일을 보았다. 지금은 이런 일들이 다 없어졌다."(吾猶及史之闕文也, 有馬者借人乘之. 今亡矣夫. <衛靈公>)
공자가 성장할 때는 '사지궐문(史之闕文)'과 '유마자차인승지(有馬者借人乘之)' 같은 아름다운 미덕이 있었지만 요즘 세상에선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사지궐문'이란 역사학자가 역사를 서술할 때 미심쩍은 일이거나 확정할 수 없는 사항에 대해서는 빈칸으로 남겨두어 후대의 정확한 기록을 기다렸다는 말이다. 모르는 것을 비워두는 건 역사학자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덕목이다. 확정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멋대로 적어버리면 역사는 신뢰할 수 없는 오류투성이의 엉망진창인 기록이 될 것이다.
공자는 배움의 방법으로서 ‘궐의 방법’을 받아들이기를 권유한다.
많이 듣되 의심나는 것은 빈칸으로 남겨두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말한다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많이 보되 미심쩍은 것은 빈칸으로 남겨두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실천한다면 후회할 일이 적을 것이다.(子曰: "多聞闕疑, 愼言其餘, 則寡尤; 多見闕殆, 愼行其餘, 則寡悔。", <爲政>)
"많이 들어서 의심 가는 것은 빈칸으로 남겨두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말하는 것"은 나를 위한 공부에 적용하기 좋은 방법이다. 제자백가를 공부하는 일에도 적용할 수 있다. 여러 제자백가의 가르침 중 지금 자신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괄호로 묶어두시라.
더구나 요즘은 가짜 뉴스가 창궐하는 시대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코로나 관련해서 성인 10명 가운데 8명이 어떤 종류든 가짜 뉴스를 접한 바가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이렇게 가짜 뉴스가 판을 치는 시대에 아무 정보나 옆 사람에게 옮기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며, 의심나는 정보는 모두 괄호 안에 넣어두는 태도가 굉장히 중요하다. 근거가 의심스럽거나 투명하지 않은 정보는 괄호 안에 넣어두는 태도가 매우 필요한 시대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공자의 위 발언은 참고가 될 만하다.
위기지학과 위인지학의 중용
공자의 자기를 위한 공부, 위기지학(爲己之學)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인 위인지학(爲人之學)과 대조된다. 《논어》<헌문> 편에서 공자는 제자들에게 오늘날에도 음미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던지고 있다.
옛사람들은 자신을 성숙시키기 위해 공부를 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공부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憲問>)
원문에서 '자기를 위하여(爲己 : 위기)'라고 한 것을 자신을 성숙시키기 위해서라고, '남을 위해(爲人 : 위인)'라고 한 것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라고 의역하면 그 의미가 더 풍부하게 다가온다. '위기지학'과 '위인지학'은 공자의 사상에서 핵심 개념이다. 공자가 보기에도 공자 시대의 제자들도 '위기지학'보다는 '위인지학'에 경도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자격증을 따고 어학 점수를 높이고 스펙을 키우기 위한 공부는 '위인지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공부도 자신을 성숙시킬 수 있지만, 이런 공부의 기준은 자기 내면에 있지 아니하고 밖에서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한 공부라는 점에서 자신이 내면을 더 깊게 만들거나 성숙시키기 어렵다. 이와 같은 공부가 아니라 안회의 답변처럼 "쓰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허물이 되겠습니까(無用何病)"의 자세로 하는 공부가 인간을 성숙하게 만든다.
중국 베이징에 위치한 공자 사당. (사진=베이징 EPA·연합뉴스)
공자가 생각하는 '자신을 위한 공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열혈 제자인 자로가 공자에게 군자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물은 대목이 있다.
"자기를 닦아서 (모든 이들을) 공경스럽게 대우한다"
"이와 같이만 하면 됩니까?"
"자기를 닦아서 남을 편안하게 한다."
"이와 같이만 하면 됩니까?"
"자기를 닦아서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자기를 닦아서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는 일은 요임금과 순임금조차도 어렵게 여기지 않았는가?"(子路問君子. 子曰: "修己以敬." 曰: "如斯而已乎?" 曰: "修己以安人." 曰: "如斯而已乎?" 曰: "修己以安百姓. 修己以安百姓, 堯、舜其猶病諸!" ,<憲問>)
이 문답을 보면 자로의 심리가 잘 드러난다. 스승인 공자가 제자 자신들에게 뭔가 다 가르쳐주지 않고 조금씩 숨기는 게 있다고 여기는 자로의 심사가 읽히는 문답이다. 자로는 계속 공자가 무언가 다 말해주지 않고 있다는 혐의를 두고 "그게 다입니까?(如斯而已乎?)"라는 태도로 일관한다. 제자에게 그런 혐의를 일게 하여 더 깊은 사고를 하게 만드는 것이 공자의 교육법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 문답에서 우리는 '자기를 위한 공부'에서 '자기를 위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나만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법을 생각하라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그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이야말로 자기를 위한 공부의 핵심이기도 하다.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만 하면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잃어버리면 스스로를 갈고 닦는 일을 할 수가 없고, 그렇게 되면 남과의 관계에서도 관계 또한 적절히 풀어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면 지혜로운 사람일까
공자의 가르침 중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바로 '어진 사람이 되는 일'에 대한 것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모두 좋아한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아직 안 된다." 자공이 다시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모두 미워한다면 어떻습니까?" "아직 안 된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선한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고, 그 가운데 악한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는 것만 같지 않다."(子貢問曰: "鄕人皆好之, 何如?" 子曰: "未可也。" "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子路>)
이 대화는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 걸까. 인간은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런데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마을 사람 가운데 누구와도 잘 지내는 사람은 덕을 훔치는 도적이다."(鄕原, 德之賊也。(<陽貨>)
'자기를 위한 공부(爲己之學)'는 '다른 사람도 이뤄주는(成物)' 공부와 이어져 있다. 우리는 여럿이 있는 자리에서 산소 같은 사람과 그 반대인 사람을 볼 수 있다. 그 사람이 오면 모임이 활기를 띠고 대화가 부드럽고 서로 아이디어가 샘솟아 일의 능률이 높아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사람만 나타나면 분위기가 싸늘해지고 모임이 다툼이 시작되고 대화가 안 되는 엇나가는 그런 사람이 있다.
'위기지학'을 한 사람은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쌓지 않고 자기 삶과 생활 태도를 돌아보고 성찰하고 갈무리하기 위해 배우고 공부한다. 자신을 닦는 사람은 남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이를 공자는 '수기안인(修己安人)'이라고 불렀다. 자기를 닦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는 말이다. '자기를 위한 공부'는 결국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혜택을 준다. 연구에 따르면 봉사활동을 하거나 선한 일을 하면 신체 면역 기능이 크게 향상되는 것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엔돌핀이 정상수치의 3배까지 분비되어 몸과 마음이 활력이 넘친다고 한다.
공자는 자신을 갈고 닦는 실천을 중하게 여겼다. 공자는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지만 '내가 이러하니, 너도 이러하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공자는 최대주의가 아닌 최소주의의 접근을 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부터 구하여 타인으로 넓혀 나가야 어진 사람이라는 그의 최소주의야말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끝없이 갈고 닦을 이유를 제공한다.
공자의 공부가 '실천'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이와 같은 점을 잘 느낄 수 있다. 공자는 문(文), 행(行), 충(忠). 신(信) 네 가지를 가르쳤는데, 문도 가르쳤지만 행, 충, 신과 같은 실천이 공부의 대부분이다. 공자의 실천에 대한 강조가 너무 강해, 후대에 공자의 사상을 설파했던 주자는 위기감을 느껴서 글 공부도 중요하다고 토를 달기까지 했다.
공자에게 공부는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전환하는 것이었다. 학이시습의 '습(習)'이 이를 말한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 '학이시습(學而時習)'이란 말은 공부하고 예습, 복습을 꾸준히 한다는 뜻이 아니라, 배운 바가 나의 삶과 '포개진다(交習 : 교습)'는 뜻이다. 배움 따로 삶 따로가 아니라, 배운 바와 실천적 삶은 일치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배우는 바가 삶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부지기수로 보아왔고, 지금도 눈만 뜨면 보고 있다. 배움과 삶이 일치하는 것은 개인에게만 기쁨을 주는 일에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기풍을 바꿔놓을 수 있는 배움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논어》에서 학(學)이란 그런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한 질문을 빌려 다시 생각해보자. 결국 공부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몸을 마칠 때까지 받들어 실천할 만한 한 마디 말씀이 있습니까?" 이 말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나의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서 : 恕)이 아닐까!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베풀지 말 것이다."("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衛靈公>)
이상수 철학연구자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철학과 대학원에서 주역 연구로 석사를, 제자백가의 논리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겨레신문 기자를 거쳐 웅진씽크빅 중국법인장, 서울시교육청 대변인을 지냈다. 공자·노자·장자·손자·순자·한비자 등 제자백가의 사상과 철학에 대한 강의와 글쓰기를 하고 있으며, 고전의 현재적인 번역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원효·김만중·정약용 등 한국철학 연구에 빠져있다. 저서로 <아큐를 위한 변명> <한비자, 권력의 기술> <바보새 이야기>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등이 있다.
(표=뉴스토마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