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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칼럼)슈퍼맨과 십만양병설
2022-08-19 06:00:00 2022-08-19 08:37:34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파죽지세로 전국 8도가 수탈당하면서 류성룡은 이이가 주창한 십만양병설을 반대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이이는 선조에게 10년 안에 큰 화가 있을 거라며 수도인 한양에 2만, 각 도에 1만을 길러 이를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묵살당했다.
 
일각에선 십만양병설이 당시 조선 사회가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조선 인구가 1200만에 불과한데 상비군으로 10만명을 유지하려면 그 유지비용에 대한 부담은 물론, 징발대상이 한정돼 오히려 민심의 반발을 불러올 우려가 높다는 논지다.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얘기했던 시절이 임진왜란 이전이라고 하나 당시에도 여진족의 침입이 이어져 그리 태평성대까지는 아니었다.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후 아직 패권 다툼이 한창이던 혼란의 시기였다. 임진왜란까지는 무리였다고 해도, 병조판서로서 향후 있을 수 있는 변란에 평소 대비하자면 충분히 할법한 현안이다.
 
이번 집중호우로 인한 침수를 보며 그때의 십만양병설을 떠올렸다면 무리일까. 서울, 특히 강남은 10년여 전인 2010~2011년 두 차례나 큰 침수 피해를 입었다. 당시 조선도 왜란을 겪은 지 얼마되지 않아 호란을 겪었다. 역사의 잘못은 늘 되풀이된다고 말하기엔 너무 씁쓸함이 남는다. 
 
이번 비가 150년만에 한 번 올 정도라는 워낙 큰 비라 침수가 당연하다지만, 피해가 커도 너무 컸다. 우리가 10년 전부터 올 여름까지 잘 대비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정부와 서울시는 침수 다음날부터 마치 준비했다는 듯 반지하를 없애고 빗물터널을 만들겠다는 대책을 쏟아냈다. 상대편 정당과 정치인이 잘못해서 생긴 일이라는 떠넘기기도 잊지 않았다.
 
정부와 서울시는 이번 기회에 반지하를 없앨 모양이지만, 이미 반지하를 없앨 수 있는 제도적 발판과 반지하 침수대책이 필요하다는 연구결과는 10년 전에도 있었다. 신월빗물터널이 큰 효과를 봤다니 왜 강남에는 없냐 싶겠지만, 10년 전엔 우리 동네엔 안 된다는 주민들의 반발도 만만찮았다. 평시가 되니 빗물터널이 정책적 후순위로 밀린 건 어찌보면 예상된 결과다.
 
이번 침수 당시 SNS를 강타한 영상 중에 ‘강남역 슈퍼맨’이나 ‘의정부 아저씨’ 등이 있다. 그들은 침수가 한창이던 긴박한 상황에서 맨 손으로 배수로 빗물받이 덮개를 열고 낙엽·비닐 등 쓰레기를 치워 물이 빠르게 빠져나가도록 도왔다. 재난 속 영웅이라 불릴만한 이들이다.
 
역으로 배수로 빗물받이 덮개만 제대로 관리됐다면, 배수로 이물질 청소만 제대로 이뤄졌다면 이정도의 피해는 없었을거라 추론할 수 있다. 강남역 같은 저지대일수록 배수로가 침수 여부를 좌우한다. 굳이 10년 전 빗물터널에서 책임소재를 따지지 않아도, 한 달 전 아니 당장 비가 예보됐을 때 배수로만 점검했다면 결과가 같았을까. 
 
이제 비가 그쳤으니 조금은 차분해지고, 피해 정도부터 원인, 대책까지 면밀히 준비해야 한다. 대책은 한참 전에 이미 나왔지만, 정작 구체적인 피해조사와 원인진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구룡마을과 강남 저지대 곳곳엔 수마의 흔적이 남아있어 연일 복구작업이 한창이고, 이주민들은 임시숙소에서 밤을 지샌다. 
 
전문가와 기술자들을 현장에 투입해 방재시설이 제대로 작동했는지 구조적으로 어느 부분이 부족했는지 정밀진단이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연구자들과 행정가들이 머리를 맞대 향후 도시 전체에 적용할 방재기준을 상향해야 한다. 내년 혹은 이후에 또 집중호우가 내리면 그때도 슈퍼맨을 찾을 것인가. 이번엔 부디 설익은 대책말고 ‘수해판 십만양병설’이라도 고민해보자. 
 
박용준 공동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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