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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호

(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53화)황토의 시인 김남주

“거기에 가면 / 남주가 있었다”

2017-02-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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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페르 라셰즈(Pere-Lachaise) 묘지에는 발자크, 몰리에르, 프루스트, 오스카 와일드 같은 작가나 비제, 쇼팽, 로시니 같은 음악가도 있고, 모딜리아니, 들라크루아 같은 화가나 이 사도라 던컨 같은 무용가도 있으며, 에디트 피아프나 짐 모리슨 같은 가수도 있다. 그런데 이 넓은 묘지의 동남쪽 벽을 향해 가면 ‘코뮌의 죽은 이들에게’라고 쓰여 있는 비석이 벽에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코뮌 전사들의 벽’, 마지막까지 결사항전을 벌이다 생포되어 정부군에 의해 147명이 총살된 곳이다. 그리고 광주민중항쟁의 희생자들을 상기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황토현의 정신을 이어받다
23년 전 오늘인 1994년 2월 13일, 췌장암으로 병마와 싸우던 김남주(1946~1994) 시인이 새벽에 먼 길을 떠났다. 9년 3개월간의 옥살이는―그 이전의 것까지 합하면 10년이다―한 시인의 육체를 피폐시켜 끝내는 그로 하여금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남겨 두고 떠나게 만들었다. 9년 넘게 옥바라지하며 편지로 마음을 나누고 겨우 5년을 함께 산 아내, 4살이던 아들은 이제 청년시인 김토일(金土日)이 되었다. ‘민중’이라는 시에서 “그대는 가장 오래 일하고 가장 짧게 쉬고 있다”고 안타까워하던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 때에는 노동자들이 금ㆍ토ㆍ일요일에 쉴 수 있기를 염원하며 아들의 이름을 토일이라 지었다.
<만인보>에는 아쉽게도 김남주 시인에 대해 따로 쓴 시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단지 두 편의 다른 시에 짧게 등장하는데 그 하나는 다음과 같다.
 
1978년 해남읍내에 김남주가 살고 있었다
광주에서도 아득한 곳
지금은 빈자리
바람소리가 혼자 살고 있었다
전라남도 해남땅
거기 두륜산에 올라서면
개인 날
바다 건너 한라산이 보이기도 하는 곳
 
< … >
(‘해남 일지암터’, 14권)
*초판본(1997)에는 “1978년 해남읍내에 황석영이 살고 있었다”로 되어 있다.
 
해남군 삼산면에서 국민(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김남주는 명문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해 마을사람들의 자랑이 되었으나 입시위주의 교육에 반대해 자퇴한 후 검정고시를 거쳐 1969년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대학수업에도 실망한 그는 3선개헌 반대와 교련 반대운동에 참여하고 교련수업에 들어가지 않아 졸업장을 받지 못하는 사태에 이른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하자 고향에 내려가 있던 김남주는 18일 광주의 이강을 찾아온다. 이강(현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회장)의 회고에 의하면, 동향친구이자 대학동기인 이 두 죽마고우는 갑오농민혁명 전적지 순례에 나섰다고 한다. 두 친구는 녹두장군의 생가에 들러 이웃집 94세 할머니의 가슴속 이야기를 듣고, 황토재의 동학혁명기념탑 앞에 머리 숙여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읊조리며 청송녹죽(靑松綠竹)을 깍아 죽창이 되자고 다짐한다. 이들은 녹두장군의 유적을 모르는 하교길의 학생들을 보며 역사교육에 대한 비애와 통분을 느낀 반면, 두루마기 차림의 60~70대의 촌로들이 황토재 녹두탑에 참배하는 모습으로부터 계시와 영감을 느껴 민족의 부름에 순명하기로 한다. (김준태, 이강 외, <김남주론>, 광주, 1988, 124-125쪽)
 
광주로 돌아온 김남주와 이강은 이강의 전세방을 사글세로 바꿔 자금을 마련해 반유신투쟁을 위한 지하신문 <함성>을 만들고, 이를 전남대와 시내 5개 고등학교에 배포하였다. 이듬해인 1973년 지하신문의 전국적 확산을 위해 <함성>을 <고발>이라는 제목으로 바꾸고 서울로 보내 전국대학생에게 배포하는데, 이른바 이 ‘함성지사건’으로 인해 3월에 연행되어 고문수사를 받고 12월 28일 항소심에서 김남주와 이강은 집행유예로, 이강의 고교선배인 박석무(현 다산연구소 이사장)는 무죄로 석방된다. 그러나 이강은 1974년 다시 ‘민청학련사건’으로 투옥되고 김남주는 그해 여름 <창작과 비평>에 ‘진혼가’, ‘잿더미’ 등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해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만인보>는 김남주의 친구 이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무등산 아래
언제나 그가 있었다
말 많은 그곳
언제나 그가 있었다
작약꽃같이
꽃잎 겹겹이 열려
 
하나둘 서울로 가도
무등산 아래
금남로에도
전남대에도
언제나 그가 있었다
 
앞장서야 한다면
앞장섰다
뒤치다꺼리라면
뒤치다꺼리였다
 
< … >
(‘이강’, 11권)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이다”―김남주의 시 ‘자유’ 중에서
1975년 2월 이강은 석방되어 고향 해남으로 가고, 반면 <함성지사건>으로 대학에서 제적되어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짓던 김남주는 해남에서 광주로 올라와 서점 <카프카>를 연다. <씨알의 소리>와 <창작과 비평>, 사상서적과 일어ㆍ영어로 된 문학서적을 취급하던 이 서점은 광주 청년학생운동 활동가들의 사랑방이 되었고 이후 <5월시> 동인지의 동인들을 많이 배출하게 되지만, 얼마 못가 문을 닫게 된다.
 
농민운동을 고민하던 김남주는 1977년 당시 해남으로 내려와 <장길산>을 쓰고 있던 소설가 황석영과 함께 ‘해남농민회’를 결성하는데, 이는 전남지역 현장문화운동의 출발점이 된다. 이 해 가을 김남주와 황석영은 현장의 농민운동가들과 함께 해남읍 서림 당산마당에서 농민추수감사제-굿을 열었고 여기에는 서울대ㆍ이화여대 탈춤판 출신들로 구성된 놀이패 ‘한두레’와, 광주의 ‘민청’(민청학련) 선배들과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해남으로 와 함께 참여하였다. 이를 계기로, 김남주는 황석영, 최권행과 함께 1977년 말 광주에서 김상윤의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민중문화연구소’를 개설한다.
 
앞서 농민축제에 참가했던 학생들은 그해 겨울 광주 YMCA의 탈춤강습회에 참가하고 Y가면극회를 조직해 서울 한두레 팀의 지도를 받아 문화운동을 준비한 끝에 1978년 봄 탈반인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를 탄생시킨다. 이들은 ‘6ㆍ29 민주교육지표사건’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민속문화연구회와 더불어 윤상원―후일 광주민중항쟁에서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한 시민군 대변인―과 박효선이 있던 전남대 연극반이 1978년 11월, 광주시 계림동천주교회에서 열린 ‘전국쌀생산자대회’에 온 수백의 농민들 앞에서 마당굿 ‘함평고구마’를 공연하였는데, 이는 마당극사에서뿐만 아니라 민중문화운동사에서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1980년 1월 극회 ‘광대’가 탄생되는데, 이들은 광주항쟁에서 5ㆍ18 문화선전대를 담당하게 된다. 윤상원과 박효선은 들불야학의 강학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김남주 시인의 이름은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광주의 한 오두막
광천동 천주교회의 한 방
밤마다
유신독재라는 것 박정희라는 것이 어둠을 채웠다
그 어둠의 한 방
들불야학
 
유신의 도시를
민중의 도시
혁명의 도시로 만드는
그 부질없는
아니
그 뜨거운 꿈의 야학
 
거기에 가면
그 비좁은 교실
그 비좁은 뒷방
거기에 가면
남주가 있었다
상원이가 있었다
 
< … >
(‘박용준’, 29권)
 
1978년 봄 김남주는 녹두서점에서 사회과학 독서모임의 일본어 공부를 지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어 교재로 쓰던 <파리 코뮌> 복사본을 한 회원이 빼앗기는 바람에 독서모임이 탄로나 김남주는 중앙정보부의 수배를 받고 서울로 도피하게 된다. 그리고 저 유명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준비위원회’의 구성원으로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979년 10월부터 1988년 12월 21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될 때까지 지난한 세월을 견뎌내야 했던 것이다.
 
‘남민전’은 사건 공표 시 73명이던 피검거자 수가 이후 추가체포로 인해 총 84명이 된 큰 사건으로, 20~60대의 구성원 들 중 다수가 무명의 생활인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남민전’에 나오는 ’남조선‘이라는 용어가 어떤 국호의 개념이 아니라 지역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남민전 관련자들과 가족들에 의하면, 미군정 시절 이승만이 의장을 맡은 하지 미군사령관의 자문기관 명칭이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인데 여기서 ’남조선‘이 남쪽지역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과 같다는 설명이다. 또한 ‘민족해방전선’ 역시 2차 대전 이후 많은 나라들에서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통일전선으로 만들어진 ‘민족해방전선’에 비유해 설명하고 있다. (<김남주론>, 203-204쪽) 사실, 남민전이 사회주의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었다하더라도 당시는 사회운동에 대한 이론적ㆍ과학적 인식이 부족하던 때였고, 알려진 바와 같이 사회과학의 발전은 1980년대에 급격히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80년대가 끝나갈 즈음에서야 김남주 시인은 해방의 몸이 된다.
 
시인으로, 전사로, 인간으로
김남주가 독서모임의 <파리 코뮌> 교재 때문에 서울로 도피할 때 황석영에게 주고 간 편지는 체 게바라가 쓴 두 통의 편지를 번역한 것이었다고 한다. 소설가 황석영은 서울에서 전사로 작전에 참가하던 그를 만났을 때 그가 한 말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어떤 때엔 몸이 마구 떨릴 정도로 무섭소. 하지만 이것은 기쁜 두려움이오. 참으로 이 길은 무섭고 엄숙한 길이어라우.” (시와사회사 편집위원회 엮음 , <피여 꽃이여 이름이여>, 시와사회사, 1994, 64쪽)
 
김남주 시인. 그는 평생 땅을 일구고 소를 애지중지하던 이 땅의 농부인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한 채 수배를 당했고, 투옥된 후에는 9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우유갑에 못으로 혹은 날카롭게 간 칫솔로 250여 편의 시를 썼다. 역시 농민인 그의 동생은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시인이 ‘가족 초청 좌담회’라는 장기수들을 위한 특별행사에서 집에서 장만해 간 밥 속에 7편의 시를 교도관 몰래 쑤셔 넣어주었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황석영 외 씀, <내가 만난 김남주>, 이룸, 2000, 43쪽)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그를 추억하며 일화를 들려주는데, 그 중 특히 인상적인 것이 문익환 목사님과 김남주 시인의 마지막 모습이다. 고(故) 박용길(1919~2011) 장로는 문익환(1918~1994) 목사가 김남주 시인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아가 기 치료법으로 그를 살리려 애쓴 기록을 일시별로 남기고 있는데, 그것은 “1993년 12월 19일 오후 6시, 22일 오후 7시, 23일 밤 9시, 26일 오후 4시, 27일 오후 4시, 28일 오후 7시, 30일(시간 미상), 1994년 1월 3일 오후, 1월 4일 오후 4시, 1월 5일 오후 6시……”이다. 1993년 12월 23일 여성백인회관에서 ‘김남주 시인 문학의 밤’이 열렸을 때도 문익환 목사는 행사가 끝난 뒤 밤 아홉 시 넘어 병원에 가 기 치료를 시도했다고 전해진다. 문익환 목사가 거의 매일 병원에 오다보니 김남주 시인도 그를 기다렸다고 한다. 고 박용길 장로는 또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994년 1월 18일, 젊은 시인을 걱정하던 문 목사가 먼저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김남주 시인의 시를 들고 다니며 모임이 있을 때마다 목이 터져라 낭송하였고, 어디 가서 노래를 부를 때면 꼭 김 시인이 지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택하여 소리 높여 부르곤 하였다.” (앞의 책, 153-155쪽)
 
1987년 9월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총회에서 김남주 석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세계 펜클럽 대회에서 그를 석방하라는 결의문이 나온다. 그리고 그는 1988년 겨울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출옥 후에도 피폐해진 심신을 쉬게 하지 못하고 그를 부르는 이곳저곳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 채 달려가 몸이 더욱 쇠약해졌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한다. 옥중에서 하이네, 브레히트, 네루다, 파농, 호치민, 푸쉬킨을 번역하고 체르니셰프스키와 뷔히너의 작품을 설명했던 그가, “시인은 모름지기 현실을 변혁하려는 용기있는 사람들의 곁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김남주론>, 184-185쪽)라고 말하며 늘 전사의 자세를 지니려 했던 그가, 출옥 후 그 긴 세월만큼 변화한 사회 속에 던져졌을 때 느꼈을 당혹감과 고뇌의 깊이를 어찌 감히 짐작할 수 있으랴. 그저, 암울한 시대의 무게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던 황토의 순정한 시인을 가슴 얼얼하게 그리워하며 그의 시구를 하나 적는다.
 
찬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김남주, '옛 마을을 지나며’)
 
'옥중 시인' 故 김남주씨.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투옥된 시인은 반외세와 분단극복, 광주민주화운동 등 현실의 모순을 질타하고 참다운 길을 모색한 '시인'이기 보다는 '전사'로 1994년 췌장암으로 사망했다.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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