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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호

(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52화)서울역 애가(哀歌)

“네 눈에 서울은 고래 뱃속”

2017-02-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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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19세기 미술작품들을 전시하는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은 원래 기차역이었던 곳으로, 그 당시 역사(驛舍)에 있던 커다란 벽시계가 그대로 보존되어 현재는 미술관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지고 있다. 조선도 참여했던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건설된 오르세 역은 1939년 운영이 중단된 후 1986년 미술관으로 거듭나 파리의 명소가 되었다. 지난 설 연휴 기간 전국적으로 3천여만 명의 이동인원 중 상당수의 사람들이 오고 갔을 서울역. 서울역의 옛 건물도 이와 비슷한 처지가 되어 인파로 북적거리는 새 건물 옆에서 역사(歷史)를 머금은 채 오롯이 서 있다.
  
남대문역의 ‘노인단’에서 ‘서울역 회군’까지
1981년 사적 제284호로 지정된 구(舊) 서울역사(驛舍)의 기원은 1900년으로 올라간다. 1899년 개통한 경인선이 한성부로 들어올 수 있도록 1900년에 한강철교가 개통되고 염천교 부근에 남대문역이 건설되었는데 이것이 서울역의 전신이다. 당시 작은 목조건물에 불과했던 남대문정거장은 1923년 경성역으로 이름이 바뀌고 1925년 르네상스 풍의 절충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새로운 역사가 준공되어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돔으로 된 지붕의 그 ‘서울역’이 탄생한다. 그런데 이 역사를 만든 주체는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로, 일본제국이 부산, 경성을 거쳐 만주로 뻗어가고 나아가 철로를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연결해 러시아와 유럽으로 진출하기 위한 거대한 계획 속에 세워진 주요한 관문이 경성역이었다.
 
경성역은 광복 이후 1947년에 서울역으로 개칭되었고, 1957년 말에 남부역사가, 그리고 1969년 초에 서부역사가 준공된다. 1988년 첫 민자역사가 건설되었고 2003년 말 현재의 민자역사가 준공되어 2004년부터 KTX 고속철도가 개통되었으며, 옛 건물은 2011년 원형 복원 공사를 거쳐 현재의 ‘문화역서울 284’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옛 서울역사 앞 광장에는 동상이 하나 세워져 있다. 1919년 9월2일, 당시 남대문역이던 이곳에서 새로 부임해 온 제3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 강우규(1855~1920) 의사의 동상이다. 당시 그의 나이 65세, 그는 1919년 3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대한국민노인동맹단(노인단)’의 요하현(饒河縣) 지부장을 맡고 있었다.
 
< … >
 
나라 잃어
나라 찾으려는 일에
어찌 나라 밖 노인이라고 가만있겠는가
1919년 노령 블라지보스또끄
신한촌거리 덕창국에서
조선 노인 50여 사람 모여 쑤군쑤군
노인단 조직하니
고문 이순
단장 김치보
재무 천수점
그해 5월 당장 일본 천황에게
조선 침략을 규탄하는 글발 보내고
그해 8월 단원 강우규를 파견
남대문 역두에서 조선총독 사이또오에게 폭탄을 던졌다
애통한 바는 명중치 못하고
노인단원 강우규 잡히고 말았다
그해 9월 지나
노인단원들 모여 엉엉 울었다
그 늙은 울음에
젊은이들도 울었다
(‘노인단’, 4권)
 
왈우(曰愚) 강우규 선생은 평안남도 덕천군 출신인데, 1883년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주해 한약방을 경영하며 모은 재산으로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민족계몽운동과 교육에 주력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1911년 북간도의 화룡현(和龍縣, 허룽)으로 떠난다.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1915년 길림성 요하현(현 헤이룽장성 라오허)으로 이주한 그는 농토를 개간해 신흥촌(新興村)이라는 조선인 마을을 만들고, 1917년에는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워 조선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속해 있던 ‘노인단’의 존재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 덕창국(德昌局)에서 결성된 이 조직은 46세~70세의 남녀들을 회원으로 받았는데, 동지 규합과 자금 모금을 통해 젊은 독립투사들의 활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사업을 지원했다. 그런데 그 일원인 강우규 의사는 무장투쟁에 참여하던 젊은이들처럼 직접 폭탄을 들고 나선 것이다. 사실, 그가 공개적으로 밝혔던 노인단의 단원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대한신민단 단원이자 한인사회당 당원이었을 것이고(그는 이동휘와 오랜 친분이 있었다), 거사가 그에 기반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어쨌든, 던진 폭탄이 빗나가 총독 암살에 실패하고 도피 중이던 그는 결국 붙잡혀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을 당하게 된다. 사형 집행 전 감상을 묻는 일본 검사에게 그가 대답했다는 시는 잘 알려져 있는데, 다음과 같다.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노인단은 1920년 4월에 해체되어 일 년 남짓밖에 유지되지 못했으나 요즘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어른다운 어른’, 젊은 세대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진정한 연장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의 씁쓸한 현실에 교훈을 남긴다. 1920년 5월 28일자 동아일보는 면회를 온 아들 중건에게 강우규 의사가 남긴 유언을 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실로 우리들을 자성케 한다. “만일 네가 내가 사형 밧는 것을 슬허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면 나의 자식이 아니다. 내가 평생에 세상에 대하야 한 일이 너무 업슴이 도로혀 붓그럽다. 내가 이때까지 우리 민족을 위하야 자나 깨나 잇치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이다. < … > 나 죽는 것이 조선청년의 가슴에 적으나마 무슨 이상한 늣김을 줄 것 갓흐면 그 늣김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 … > 눈을 감고 안젓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랴고 하는 십삼도에 널녀 잇는 조선청년들이 보고 십다. 아! 보고 십다.“
 
강우규 의사가 거사를 실행했던 1919년 9월 2일의 남대문정거장은 서울역이 되었고, 1980년 5월 15일 ‘서울의 봄’을 맞아 서울역 앞 광장에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10만여 명 이상의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들어 계엄 해제와 민주주의를 외쳤다. 비록 ‘퇴각’을 결정한 학생지도부에 의해 ‘서울역 회군’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은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역전(驛前), 삶의 풍경들
해방은 되었으나 분단과 전쟁을 겪어야 했던 이 땅의 필부들은 제각기 사연을 가지고 서울역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하여 서울역에는 갖가지 애환이 스며들었다.
 
서울은 다 받아들인다
여기서 살아라
여기서 죽을 테면 죽어라 하고
 
서울역전 출구 언저리
지게꾼들이 대기하고 있다
그들은 열차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다
 
걸핏하면 침이나 뱉으며
제미럴
제미럴
누구에게인지 욕이나 뱉으며
지게 등받이에 기대고 있다가
 
열차가 도착하기 직전이면
벌떡 일어나
빈 지게 지고 일어선다
 
그때에야 눈이 빛난다
충혈된 눈이지만
가야산이나
오대산에 한 달만 가 있으면
아주 맑아질 눈이 빛난다
 
여객들이 나온다
짐을 살핀다
무거운 짐을 살핀다
60년대 말 고향 떠나
서울역전 짐꾼이 되어
무거운 짐을 살핀다
 
지게질이야 어릴 적부터 이골이 난 터
그들의 말투는 전라도 충청도 사투리지만
이제 그들의 마음속에는 고향의 인정 따위 들어 있을 리 없다
 
< … >
(‘서울역 지게꾼’, 10권)
 
“고향의 인정 따위”는 잊고 “왜 니놈이 / 내 짐 채가냐”며 “하루에 한두 번씩 / 동료 지게꾼과 멱살 잡”고(앞의 시) 싸우는 이 지게꾼들도 처음 상경할 때는 아마 다음의 소년과 비슷한 모습이었으리라.
 
대낮같이 밝았다
< … >
서울역전
사람들 빠져나갔다
 
지퍼가 고장난 가방 든 채
호남선에서 내린 한 소년이 서 있다
올데갈데없이
 
바야흐로 네 인생이 시작되는 밤이었다
네 눈에 서울은 고래 뱃속
그 고래 아가리에
서슴지 말고 들어가거라
 
나와보거라 무작정 상경 아닌 놈 그 누구더냐
(‘서울역’, 13권)
 
이 시는 <만인보> 전 4001편의 시들 중 단 60편만이 번역되어 있는 불어판에 실리는 행운을 잡았다. 시인이자 전(前) 파리 8대학 불문학과 교수 끌로드 무샤르(Claude Mouchard)는 이 시에 대해 경탄을 표하면서, 무작정 상경해 서울역에 내렸을 소년의 가방이 “지퍼가 고장난” 상태인 것까지 섬세하게 묘사된 것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서울역의 이 소년은, 시골에서 꿈을 안고 파리로 올라온 여느 프랑스 소년으로 대체될 수도, 모스크바의 한 역에 내린 러시아 소년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올라왔든, 고향을 야반도주해 올라왔든, 그들은 설렘과 두려움으로 새 인생을 시작했고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근근이 유지하거나 망쳐졌다. 1960-70년대의 수많은 이들이 그렇게 ‘고장난 지퍼’의 가방처럼 불안한 상태로 서울이라는 고래 뱃속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서울역 엘레지
순진무구한 시골처녀에게 “고래 아가리”, 즉 서울의 관문을 통과하는 것은 남자들에 비해 더 위험이 도사리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소녀들은 그 첫걸음부터 불운하게 시작하여 서울역의 애절한 사연들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아마도 친구 따라 구로공단에서 일하려고 상경했을지 모르는 한 소녀의 불행은 이렇게 시작된다. “밤이면 서울역 일대가 휘황찬란하다 / 인정 하나 맡길 데 없이 / 그냥 휘황찬란하기만 하다 // 처음 서울역에 내려 / 쪽지에 적힌 / 구로동 주소 / 행순이 주소 하나 들고 // 오랜만에 바른 분이라 / 거친 살갗에 배지 않은 채 / 어리둥절인데 // 꼭 내 누이 같구나 하고 / 쪽지 낚아채버리며 / 가자 / 길 건너가면 / 거기 가는 버스 있다 / 하고 데려간 곳이 / 도동 창녀소굴 // < … >“(‘도동의 밤’, 15권).
 
많은 소녀들이 공단으로 가 ‘공순이’로 천대받던 시절, 또 다른 많은 소녀들은 ‘버스 차장’이 되어 반말과 욕설과 성추행까지 견뎌내야 했다. 달리는 완행열차 안에서 태어나 ‘차순이’라 이름 붙여지고 ”열여섯살까지는 우물 두레박질에 이골이 났“던 소녀가 그들 중 한 명이다. “어머님 성공해서 꼭 돌아오겠습니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서울로 떠난 소녀의 사연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무작정 상경
완행열차 달려서
서울역이었지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도동이나
종로 3가로 넘겨지지 않아
 
버스 차장으로
서울역 청량리 사이 버스가
그의 직장이었지 억척이었지
오라잇! 하고 손바닥으로 버스 몸통을 탁 쳐 버스 놀라지
 
뭐든 하나둘 있다 없어지는 세월
종로 3가 사창가가 몽땅 없어졌지
이어서
버스 차장도 없어졌지
 
1975년이 다한다
차순이
너 어디에 있느냐
짜장면 40원짜리가
50원짜리로 올랐다
너 어디에 가 있느냐
(‘차순이’, 10권)
 
지게꾼도 사라지고 버스 차장도 사라진 서울. 그러나 서울역 광장의 한편을 지키는 노숙인들과 날아오르는 비둘기들, 여전히 기차가 실어오고 실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은 오늘도 서울역에 한 켜 한 켜 쌓여가고 있다.
 
1977년 서울역 추석 귀성객 전경.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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