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기자
닫기
박민호

(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43화)“시대는 한 걸음도 조심스러운 언론인을 / 역사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70년대 사람들⑦‘동아투위’와 백지광고에 맞선 사람들

2016-11-28 06:00

조회수 : 6,715

크게 작게
URL 프린트 페이스북
종합편성채널이 출범할 당시, 업계 내 지배적 위치를 점하는 보수신문들의 방송진출이라는 우려와 더불어 미디어법의 날치기 통과와 같은 위헌, 그리고 갖가지 위법·편법 논란이 일어나 비판을 받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요즘 그 채널들 중 한 곳이 국민들에게 가장 신뢰를 받고 있다. 언론인으로서의 소명의식 혹은 책임감 있는 지도자가 꾸준히 타 방송과는 차별화된 뉴스를 이끌어 오더니 이제는 진실에 목마른 국민들이 의지하는 제1뉴스가 된 셈이다. ‘지도자’를 잘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편으로는 국가 차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방송사 차원에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방식으로 느끼게 된다.
 
동아일보·방송 기자 등 해직과 백지광고 사태
 얼마 전, 최근 국민들이 상대적으로 가장 신뢰하게 된 한 TV 방송이 보도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에 그 보도국 기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비춰주고 진행자로 카메라를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짧은 그 순간이 필자에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는데, 하 수상한 시절에 국민들에게 제대로 된 뉴스를 보도하고자 입술이 부르트도록 취재하고 준비하는 기자들과,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사명감과 자부심을 심어주며 이끄는 대표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 평범한 우리 국민들은 진실을 보도하는 자유로운 언론을 기대하였던가. 물론 아직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몇몇 언론들의 노력을 보며―또한 진실 보도를 억압하는 자신의 조직에 대항해 싸우는 개별 언론인들을 보며―안도와 감사를 느끼는 것은 우리 역사의 굴곡을 생각할 때 그것이 얼마나 드물고 힘든 일인지를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부터 기자들 스스로도 이른바 ‘기레기’라는 자기비하적 표현을 사용하게 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으나, 어떤 시대에는 남은 평생 다가올 사적인 불이익을 감수하면서―한 가정의 가장에게 그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정의를 쫓느라 해직·해고되고 길거리로 내몰려, 어쩌면 가족에게 원망을 들어가면서도 신념을 접을 수 없었던 이들이 있다. 서슬 퍼런 유신의 칼날 속에 언론의 민주화를 위해 지난한 싸움을 해야 했던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의 해직언론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막내둥이
소년이었다
청년이었다
그러나
어느 선배보다 드넓은 밀물
어느 선배보다 뜨거운 불길

< … >

70년대였다
이런 젊음의 르네쌍스 있어
거기에서
순정과 싸움의 음악이 퍼져갔다
뜨거운 가슴 뒤
꿈이 고기압권의 바람처럼 길고 싸아했다
(‘정연주’, 10권)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해 신문ㆍ방송ㆍ잡지의 외부 간섭 배제, 기관원 출입 거부와 언론인의 불법연행 거부를 결의하였다. 12월 16일 박정희 정권은 광고탄압을 가해 12월 26일부터 백지광고가 나가기 시작한다. 언론인 홍종인 선생이 12월28일~30일 신문 광고란에 개인 이름으로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는 글을 실은 후, 1975년 1월 1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이라는 제목으로 익명의 격려문을 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등 여러 단체의 글도 광고란에 실리게 된다. 이후 각계각층 시민들의 격려광고가 쏟아져 3월 25일까지 9223건에 이르렀다고 한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3월 12일 제작거부에 들어갔고 23명은 공무국을 점거해 단식투쟁을 벌이지만, 3월 17일 새벽 3시 사측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들에 의해 농성 중이던 160여 명이 폭행당하고 쫓겨나게 된다. 결국,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기자ㆍ프로듀서ㆍ아나운서ㆍ엔지니어 등 총 113명이 해고를 당했고, 이들은 3월 18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하게 된다. 3월 21일에는 조선일보 해직기자 32명도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를 결성하였다.

현재진행형인 ‘동아투위’
 동아투위 사람들은 폭력배들에 의해 거리로 내몰렸던 1975년 3월 17일 이후, 41년 8개월째 투쟁하고 있다. 그들은 매월 17일(해고일) 모임을 가진다. 당시 20-30대의 젊은이들로서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에 저항했던 이들은 이제 대부분 70대가 되어 2016년 박근혜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에서 또다시 언론의 자유와 민주를 위해 거리에 서 있다. 11월 26일 '박근혜 즉각 퇴진 5차 범국민행동' 집회에서 만난 동아투위와 또 다른, 70년대 언론민주화를 위해 싸우셨던 여러 선생님들의 모습은 필자에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젊은 언론인 후배들 이상의 열정으로 40여 년 동안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위해 늦은 밤까지 거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현장에서 인터뷰를 한 김종철(72세)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으로, 2013년 3월 이래 동아투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만인보>는 다음과 같이 그를 노래하는데, 유신 치하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가던 단단하고 지적인 한 언론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동아투위 언론인들. 왼쪽부터 차례로 김종철 위원장, 조강래 전 피디, 이영록 전 기자, 신정자 전 피디. 사진/필자

< … >
그의 열정은 반드시 배타적이다
아나 나 잡아가거라 순순히 검거되지 않는다
훌쩍 담 넘어 달아난다

여기 저기 숨어서
그는 태연히 책을 읽는다
그의 노래는
당장 혁명이 일어날 듯한 노래이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말은
당장은 아니지만
내일모레쯤
혁명이 일어날 듯한 말

그는 압축된 공기로 된
팽팽한 공이다
가장 세게 찬 공이다
(‘김종철’, 10권)

 동료들과 함께 집회 현장을 지키는 그에게 소회를 묻자 그의 대답은 이러하다. “1960년 4ㆍ19와 1987년 6월항쟁을 다 겪었지만 그와 비교할 때 오늘(26일)의 집회는 말할 수 없이 더 대단합니다. 오후 7시 현재 날씨도 나쁜데 백만 명 이상이 모인 열기는 현 대통령이 빨리 퇴진해야 한다는 강한 요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70년대는 단순히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했는데, 지금 박근혜는 모든 주권자들을 적으로 만들어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에 대해 사과도 안하고 4% 지지율이어도 그 자리에 있겠다고 하니 말이 안 되지요. 빨리 사퇴하고 개인으로 돌아가 그동안 지은 죄에 대해 법적인 심판을 받아야 하고 그것이 주권자들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봅니다.“ 김종철 위원장은 또한, 현 대통령이 그의 아버지의 비극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백만 명이 모이는 이런 집회는 정치선진국에서 볼 때도 거의 기적적인 일로, 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물러나게 될 것이고 다음의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서 진정한 민주·평화체제가 이뤄지리라 믿고 있다고 밝혔다.

 박정희 정권의 블랙리스트로 인해 동아투위 뿐만 아니라 해직언론인들은 취업을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세월을 살게 된다. “대학 국어국문학과 출신인데 / 영어영문학과 출신 같았”던 김종철 위원장의 경우, “해직언론인이라 / 알렉스 헤일리가 대신 쓴 / 말콤 엑스 자서전을 번역해야 했”고 “에리히 프롬도 / 콘도 번역해야 했다”(앞의 시). 그밖에도, 알베르 마띠에가 쓴 프랑스 혁명사, 트로츠키 전기 등 동료들과 20권 정도의 번역을 해 출판계에 기여하고 학문적 저변을 넓히는데 공헌했다. 그러나 많은 해직언론인들과 그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실로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세월에 씻기기도 어려운 것이리라.

한겨레신문 창간과 출판운동

 1980년 언론 통폐합으로 또 다시 일군의 해직언론인들이 양산된다. 이들과 동아투위, 조선투위 등이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주언론시민연합’)를 설립하고 1985년 기관지인 <말>을 발간해 언론민주화를 주도하였는데, 당시 초대 의장이었던 송건호(1927~2001) 선생은 1975년 당시 동아일보가 직원들을 계속 해임하자 3월 15일 스스로 사표를 제출하고 편집국장 자리를 떠났던 인물이다. 그가 신문사를 떠날 때 “동아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시대는 착실한 세대주를
지조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시대는 속절없는 독서인을
거리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시대는 한 걸음도 조심스러운 언론인을
역사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해방정국 백범 장례행렬을 보았다
그런 청소년 시절 이래
시대가 덜 가파로웠다면
그는 그냥 한 소시민이었으리라

오래전에 걸린 연이 삭은 대추나무에
해거리인가
< … >
드문드문 달린 대추 익은
늦가을
그가 오리걸음으로 아장아장 걸어간다

아는 길도 속으로 물어가며 물어가며
천원 주고 산
헌책 두 권 들고 걸어간다
(‘송건호’, 11권)


 독재정권에 맞서다 쫓겨난 동아투위, 조선투위의 해직기자들과 1980년의 해직언론인들은 마침내 1988년 <한겨레신문>을 창간하게 된다. 초대 대표이사 역시 송건호 선생이 맡았는데, 이후 <한겨레신문>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진보언론으로 자리 잡는데 토대를 닦았다. 동아투위, 조선투위에게는 13년이 지난 후에, 그리고 80년의 해직언론인들에게는 8년이 지난 후에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새로운 신문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매우 감회가 큰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노력은 오죽했으랴. <한겨레신문>은 해직언론인들에 의해 창간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식을 공모하여 모금된 자본금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해직언론인들이 생기면서 등장한 또 하나의 풍경은 출판운동의 성장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동아일보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약칭 동아투위
거기 무더기 해직될 때
그도 해직이었다

한마디로 참 잘 해직되었다
김언호
그는 신문사 보병이 아니라
그 자신의 스키타이 기마민족이었다

마음껏 책을 내어 잔치 벌이는
출판사가 그 자신이었다

70년대 복판
가망 없던 시절
차츰 출판이 하나의 운동이었다

< …>

온 세상의 진보에 기여하는 책이 쏟아져나왔다
쏟아져 나와 홍수였다 폭발이었다
< …>
(‘김언호’, 12권)


신문로 뒷골목에 출판사를 차렸다
청출어람
청람

그것이 출판사 이름이었다
도무지 그 거창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았다
좀더 큰 일
좀더 굵직한 일
아니면
좀더 먼 데까지 차지해야 할 포부가

서너 평짜리 방 한칸
돌아앉았다가
한번 일어난다
잔글씨 교정 보다가

두꺼운 손바닥이 어둠이었고 신뢰였다

동아 해직기자 이래
속으로 활활 타오르는 것 있어도
꾹 참아
아무것도 내보이지 않고 웃는다
< …>
(‘권근술’, 14권)


 이들 외에도, ‘최장학’(14권), ‘정태기’(10권), ‘안성열’(14권)과 같은 해직기자들이 <만인보>에 등장하는데, 사실 언론의 민주화를 위해 싸운 그 많은 해직기자들을 생각한다면 매우 적은 사람들만 등장한 것이겠으나, 그 시절을 직접 살지 않은 세대들이 <만인보>를 읽는다면 이곳저곳에 보이는 인물들을 통해 “해직기자들이 많았네?”라는 생각을 할 법도 하다. 그리고 부당하게 해고당한 그들의 권리가 아직도 복권되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8년에, 1975년 동아일보의 광고탄압과 강제해직이 언론통제를 위한 공권력의 부당한 조치였음을 밝히고 국가의 배상을 권고했지만, 동아일보 해직기자와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냈던 손해배상 소송들 중 극히 일부만이 2015년에 처음으로 승소했다. 게다가 정작 신문사는 여전히 아무런 사과도 없다. 70대가 된 해직언론인들이 바라는 것은 상징적으로 며칠, 아니 단 하루라도 복직이 되어 명예롭게 퇴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KBS 언론인이 집회에서 직접 폭로한 바―박근혜로부터 직접 임명장을 받은 KBS 직원이 12명이라는 것. 동아투위의 한 해직언론인은 ”박정희의 업보를 박근혜가 마무리하고 있다“라고 피력했는데,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해직된 언론인들이 그 딸의 국정농단을 단죄하러 또 나서야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인 듯싶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 박민호

  • 뉴스카페
  •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