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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호

(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42화)70년대 사람들⑥유신시대의 한 풍경-시인과 형사

“선생님 덕분에 / 이렇게 신선 노릇입니다그려”

2016-11-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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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9일 오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오보·괴담 바로잡기 ― 이것이 팩트입니다”라는 배너가 걸리고 오후에는 수구단체들이 대다수 국민들에 맞서는 ‘맞불집회’를 열어 대통령 하야 반대를 외치는 등, 마지막을 향해 가는 현 정권의 공세가 펼쳐지고 있다. 2012년 겨울 국가정보원의 여론조작ㆍ대선개입으로 출범한 정부 밑에서 국민들은 2013년 시국선언, 2014년 세월호 참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대한 사이버 검열과 민간인 사찰, 2015년 한국사 국정교과서 사태, 2016년 사드 배치 결정을 겪은 후, 드디어 최악의 국정농단 사태에 또다시 시국선언을 하고 매일 광장에 모인다. 우리는 과연 ‘유신의 망령’을 쫓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 시절 시인의 동거인들 
실로 유신의 잔재들이 끈질기게 이 땅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매일 새로 터져 나오는 박근혜 대통령 관련 뉴스는 아무리 까도 계속 나오는 양파 껍질인지라 충격 받고 놀라던 국민들도 이제는 무디어질 정도이다. 현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무리들―최태민, 최순실 일가―의 역사가 박정희 유신정권으로 올라가다보니 그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만인보>의 저자 고은 시인이 19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한복판에 서서 유신시대 내내 그리고 이후까지 고초를 겪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각계각층의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일을 도모하고 수많은 집회와 시위, 강연과 행사에 참여했으며, 그런 중에도 부지런히 시ㆍ소설ㆍ평전ㆍ평론ㆍ강연문ㆍ이론적 수필과 동화, 주석을 보탠 번역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글쓰기로 창작을 해왔다. 그가 글을 쓰지 못했던 때는 수차례에 걸쳐 유폐ㆍ구금ㆍ구속당하고 투옥 생활을 해야 했던 때와, 1975년 긴급조치 9호로 칩거를 강요당해 절필(絶筆)했던 때 정도일 것이다.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1973년 시인이 화곡동으로 이사한 후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자살 시도를 했었고, 10년간의 승려생활(1952~1962년 초)을 마감하고 환속한 이후 그를 ‘허무주의’로부터 ‘역사’로 이끌어 낸 계기가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라는 것도 잘 알려진 바와 같다. 화곡동 시절 시인의 집은 문인ㆍ화가 등의 예술가를 비롯해 민주화운동 활동가ㆍ학생ㆍ노동자 등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아지트였다. 경찰서와 정보부의 ‘단골손님’이던 고은 시인에게 화곡동을 관할하는 강서경찰서의 정보과 형사가 배치된 것은 당시로서 당연한 일이었던 셈이다.
 
영등포경찰서 정보과에 있다가
강서경찰서가 설치되자
그곳 정보 2과에 속해서
70년대 내내 한 시인과의 10년 가까운 동거인 노릇
 
그가 바른 포마드
숱 많은 머리
잠재우는 포마드
그 냄새가 역겹다가
그대로 정들어버린 동거인
 
그 시인이 결혼식 주례를 하러 가면
거기에도 동행
술집에 가면
술 한잔 놓고
저쪽 자리에서 앉아 있다
술 마신 다음날
목욕탕에 가면
거기에도 동행해서
함께 벌거숭이로 온탕에 들어가고
그래서 냉탕 온탕 번갈아가는 것도 배웠다
부산 광주 대구에 강연 가면
거기에도 동행
상부의 지시가 있으면
집에서 나오지 못하게 전경 열 명을 배치한다
눈빛 빛나는 착실한 사람
자주 푸른색 와이셔츠의 사람
< … >
그러다가 그 시인이 감옥으로 가면
노루꼬리만한 인세 은행에 잘 간수해주기도 하며
(‘임병휴 형사’, 13권)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해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킨 후 유신헌법을 국민투표로 의결한다. 유신헌법은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를 실시하게 했다. 또한,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며, 대통령은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긴급조치권과 국회해산권, 모든 법관의 임명권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연임 제한을 없애 종신 집권의 기반을 마련하는 등, 유신헌법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대통령에게 부여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관련자 김재규(전 중앙정보부장) 피고인이 육군본부 계엄 보통군법회의(재판장 김영선 중장)에서 선고공판을 받기 위해 포승에 묶여 걸어오며 웃고 있다. 사진/뉴시스
 
10월 유신은 19세기 말 메이지(明治) 유신과 1930년대 쇼와(昭和) 유신에 그 이념적 기초를 두고 있다. 특히 일본 군부 급진파와 극우세력이 주도한 쇼와 유신은 천황 중심의 국가개조론으로, 박정희의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군부의 정치개입을 당연하게 여기는 군국주의 파시즘으로, 민주주의에 적대적이고 반공정책을 강조한다. 유신체제는 일제의 이러한 군국주의 파시즘으로부터 다양한 통치방식을 빌려와 시행하였는데, 예를 들면 일제의 농촌진흥운동과 국민총력운동이 유신시대의 새마을운동으로, 애국반상회가 반상회로, 일제강점기 학생 군사훈련이 ‘교련’으로 바뀌었다. 또한 일제 말 전시체제기의 ‘국민개창운동’이 ‘건전가요 국민개창운동’으로 계승되고, 월요일 아침 애국조회도 계승되어 조회시간에는 ‘황국신민서사’ 대신 ‘국기에 대한 맹세’와, ‘교육칙어’ 대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는 광경이 펼쳐졌던 것이다. 또한 유신체제의 ‘총력안보’는 일제의 전시총동원체제에서, ‘고도국방’은 만주국의 ‘고도국방체제국가’에서 빌려왔고, ‘경제개발5개년계획’ 역시 일제의 만주식민지 경영을 담당한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관동군과 함께 입안했던 ‘만주산업개발5개년계획’과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긴급조치의 시대와 ‘긴조세대’
1970년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즐겨 사용하던 ‘긴급조치’에 지배받던 시절이기도 했다. 유신헌법 제53조 2항을 보면, “이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하는 긴급조치”라고 그것의 성격을 밝히고 있다. 대통령의 명령인 긴급조치 하나면 눈에 거슬리는 민주화운동 활동가들을 줄줄이 잡아들일 수 있으니 이는 일종의 만병통치약 같은 효과적인 수단이었던지라, 1호(1974년 1월 8일부터 시행)부터 9호(1975년 5월 13일부터 시행)까지 발동되었다. 2010~2013년 사이 몇 차례에 걸쳐 긴급조치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으니 이 조치로 인한 희생자들의 무고함이 공식적으로 확정되기까지 한 세대 이상의 시간이 훨씬 넘게 걸린 셈이다.
 
1970년대가 생생하게 묘사된 고은 시인의 일기 한 자락(1976년 12월 7일 화요일)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세상은 조치! 조치! 조치! 뿐이다. 이놈의 긴급조치로 박은 조치 왕초가 되었다.”(고은, <바람의 사상: 시인 고은의 일기 1973-1977>, 한길사, 2012, 923쪽) 여기서 박은 물론 박 전 대통령이다. 긴급조치 제1호가 공포되기 하루 전인 1974년 1월 7일 ‘문인 61인 개헌지지성명’이 발표되었는데 고은 시인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61인은 전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이른바 ‘문인간첩단사건’이 조작되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현실 참여적 문학단체가 결성되는데, 이것이 바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이다. 고은 시인이 대표간사를 맡았던 이 조직은 1974년 11월 18일 30여 명이 광화문 문인협회 사무실 앞에서 ‘문학인 101인 선언’을 낭독함으로써 70년대 내내 문학적 실천을 주도해 간 문학인들의 족적을 남기기 시작한다.
 
이 시기 고은 시인의 일기에는 형사나 정보부 요원들이 수시로 등장하는데, 61인 개헌지지성명으로 인해 남산(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고 풀려나던 순간을 시인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눈 내린 남산 경치는 일품이다. 이런 풍경 속에 지옥이 있다. 6시에 풀려났다. 다시 이곳에 오지 마시오. 이곳에 오는 길은 죽음의 길일 수도 있소. 이런 인사가 있었다. 나는 제법 선사답게 한 마디 안 할 수 없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죽을 결심을 한 목숨 아닌가요. 수사관의 눈빛이 고약해졌다. 속으로 짜아식! 그러는 것 같았다.”(앞의 책, 153쪽, 1974년 1월 26일 토요일 일기)
 
다음의 시는 송광사에 유폐된 시인과 그의 시대적 동반자인 형사가 출현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고은 시인이 ‘민주구국헌장’ 사건으로 인해 중앙정보부의 지하실에 갇혀 있다가 송광사에로 유폐되어 있던 때인 듯하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 신ㆍ구교의 합동 미사에서 ‘민주구국선언문‘이 낭독되고 이 선언문에 서명한 관련자들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긴조세대‘(긴급조치로 인해 법적인 처벌을 받은 사람들)가 된다. 이듬해인 1977년 3월 22일 ‘3·1민주구국선언’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내려지자 이와 관련해 시국성명이 발표되는데, 그것이 바로 ‘민주구국헌장’이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부산시청 앞 계엄군의 모습. 사진/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소백산 영주 부석사 뜨락에는
의상대사 지팡이가
꽂힌 채
그대로 자라난 나무
 
순천 송광사에는
보조국사 지팡이가
꽂힌 채
그대로 살아온 나무
 
2천년
천년
그런 세월 지나
 
가까이는 오대산 중대 단풍나무도
한암선사가 짚고 다니다
꽂아둔 것
< … >
 
한 유신시대 시인은
중앙정보부의 강제유폐로
오대산 중대
조계산 송광사에서
그런 지팡이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늙다리 담당형사가 앉아 있었다
허 참
선생님 덕분에
이렇게 신선 노릇입니다그려
낮에는 매미소리 뻐꾸기소리
밤에는 소쩍새소리
 
시인이 말하기를
여보 당신도
지팡이 하나
짚고 다니다가
꽂아 두고 내려가구려
누가 알우?
(‘지팡이’, 15권)
 
독한 담배가 필요한 시대
시인과 함께 목욕탕에도 가고 그가 감옥에 가있는 동안 인세를 은행에 간수해주기도 하는 형사도 있지만, 당시 수사관들의 많은 경우는 적대적인 관계에서 취조와 고문을 하는 위치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중앙정보부나 대공분실 근무자들은 취조를 받는 사람들에게 정신과 육체의 양면에 끔찍한 기억과 흔적을 새기곤 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자신의 책 <남영동>(2007)에서 증언하고 고문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고 김근태(1947~2011)씨, 그를 고문했던 이근안이 목사 안수를 받고(얼마 후 면직되었다고는 하나) 출판기념회를 하고 회개 운운하다가 "내가 한 일(고문)은 애국이다"라고 진심을 말한 것은 섬뜩한 일이다. 인간의 존엄을 말살하고 정신과 육체를 파괴하던 ‘인간도살장’의 ‘인간 백정’이 횡행하던 시대, 오늘날 그 시대가 극복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고은 시인 역시 수감 중 고문으로 인해 귀의 고막이 파열되어 청각을 잃고 수술을 해야 했던 시절, 시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또 다른 취조관 혹은 고문기술자들의 모습은 이러하다.
 
담배 선이 좀더 독했다
70년대
분홍빛 담뱃갑이 화려했다
< … >
 
담배 거북선이 덜 독했다
중앙정보부 수사국 내 담당
공채 사무관이었다
 
내가 거북선만 하루 세 갑 피우는 것을
선으로 바꾸라는 충고
때로는 남산 기슭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도
20여 일 갇혀 있는 동안
피범벅으로 서로 정들어
미워
미워
정들어
이런 정다운 충고
 
어서 불어요 불어
살아 나갈 작정이면이라는 으름장 따위
다 사라지는 충고
 
그 뒤로 나와
선으로 바꿔 피웠다
훨씬 좋았다
 
선 한대 피워물면
신촌 소줏집
서른 살 주모가 따라 주는 술
핑그르르 눈물이 되었다
(‘담배 선’, 12권)
 
남산 중앙정보부 신과장
항상 정장이다
70년대로는 드물게 드물게
비싼 허리띠
비싼 시계
비싼 구두 번드르르
이브생로랑이던가 뭐던가
던힐이던가
 
< … >
 
그가 지하실 조사실 2호실에 납실 때는
비싼 금테안경 속 눈동자
형광등 불빛 받아
한번 더 싸늘
내가 앉은 의자 다리를 박차
내가 엉덩방아를 찧는다
 
그대로 씨멘트 바닥에 꿇어앉아
너 여기를 단골집으로 알지
이제 10년짜리 감옥으로 보내줄 테니
단골 끝내
 
너 아무개 새끼하고 계획한 것 어서 말해
(‘신과장’, 12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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