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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호

(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41화)“이런 고교생들 혁명의 한쪽 맡았다”

1960년의 아이들, 2016년의 아이들

2016-11-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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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5일 대구의 박근혜 퇴진 요구 집회에 참여한 한 여고생의 자유발언이 화제였는데, 12일 서울의 민중총궐기에도 자유발언을 한 여중생을 비롯해 많은 중고생들이 참여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청소년들도 많았는데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한 청소년 단체가 그 전 주의 촛불집회에서 모금한 돈으로 학생들의 차비를 지원했다고 한다. 수능시험을 5일 앞두고도 거리로 나와야 했던 고3생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교복을 갖춰 입고 “꿈이라도 꿀 수 있게 해 달라”고 외치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어떤 나라를 물려줄 수 있을까.
 
관제ㆍ어용에서 자유의지로
지난 토요일은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라는 예상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감동을 준 날이다. 1987년 6월민주항쟁 당시 최루탄으로 숨진 연세대 학생 이한열의 장례식 때 모인 100만 인파 이후 29년 만에 100만 명이 모였다는 것,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때의 70만 명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 보도되었다. 가족 단위로 나온 집회 참가자들이 유독 많아 부모의 손을 꼭 쥐고 있는 어린이들, 유모차에 타고 있거나 아빠에 의해 무등 태워진 어린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띠었다. 친구, 연인,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함께 하고, 중고생들인 10대부터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까지 모든 연령층이 골고루 모여 세대를 아우르는 집회였으며 각종 직업군이 섞여 있는 집회였다. 기차표가 매진되고 전세버스가 동이 나 개인 차편으로도 올라왔다는 지방 참여자들의 수가 최소 10만 이상이고 여기에는 부산ㆍ경남의 2만5천 명부터―전세버스 350대로 이동했다고 한다―제주의 1천 명에 이르기까지 각 도가 포함되어 있다.
 
6월항쟁을 이루어낸 국민들의 힘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던 시대의 풍경은 아쉽게도 <만인보>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만인보>는 광주민중항쟁까지를 다룬다),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는 2016년의 국민들에게는, 4ㆍ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루어낸 국민들의 힘이 상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2016년의 10대들처럼 1960년의 10대들이 서 있다.
 
까마귀떼 자오록 내려앉는다 보리밭두렁
까만 학생복 윗도리
단추 다섯 개
누가 넘어지면
으라차차
입속의 흰 이빨 가지런했다
이런 고교생들
이런 고교생들 혁명의 한쪽 맡았다
 
< … >
 
해방의 시대
전란의 시대
독재의 시대
관제시위 어용시위에 길들여진 소학생들 중학생들
 
이제는
반독재의 시위
반부정부패의 시위로 바뀌어
교문을 넘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까마귀떼 날아올랐다
검은 모자
검은 제복
검은 운동화로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오랜 관제시위 어용시위로 숙련되었다
어깨 겯고 노래 부르고
구호 외쳤다
나아갔다
 
< … >
(‘고교생들’, 21권)
 
1960년 순수했던 소년의 마음이 70ㆍ80ㆍ90년대 어른으로 나이 먹어가며 조금씩 때가 타고 정치권에 가서 완전히 변색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당시 그 순간의 순수함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시위문화와 관련해 당시의 중고생들이 오늘날과 다른 것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 워낙 많은 관제시위에 동원되어 ‘숙련’되었었다는 것이다. 그 숙련된 기술과 노하우를 활용해 3ㆍ15 부정선거 항의시위를 조직하고 4ㆍ19로 나아갔다. 그러나 오늘의 청소년들은 발랄한 아이디어와 노래와 춤을 시위에 활용할 줄 알고 그림으로 풍자하고 패러디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안다. 다른 환경에서 성장해 다른 방식으로 시위를 만들어가지만, 어른들이 망쳐놓은 나라를 바로잡겠다고 나서는 미래의 주역이란 점에서는 동일하다.
 
4ㆍ19혁명 때 발포로 대처한 이승만 정권이나, 6월항쟁 때 최루탄으로 대처한 전두환 정권이나, 2015년 1차 민중총궐기 때 물대포로 대처해 백남기 농민을 사망에 이르게 한 현 정권이나 별 다를 바는 없지만, 지난 12일의 집회를 보며 많은 변화들을 느끼게 된다. 6월항쟁 때의 젊은이들이 북과 꽹과리 소리를 들으며 행진했다면, 2016년의 젊은이들은 록밴드와 랩 음악에 맞춰 구호를 외친다. 4ㆍ19세대의 자녀들이 6월항쟁의 중심이 되고, 6월항쟁 세대의 자녀들이 2016년 시위의 중심에 서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자녀의 손을 잡고 나오는 시위문화가 생긴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단지, 시위에 익숙해지고 ‘세련’된 국민이 되게끔 만드는 역사와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린이가 겪는 시위의 기억
4ㆍ19 당시 한 국민학교(초등학교) 어린이가 경찰의 발포로 인한 총상으로 사망한다.
 
이녀석아
< … >
한승이 이 녀석아
 
수송국민학교 6학년 3반
전한승
이 녀석아
 
1960년 4월 19일 오후 네시 반
수송동 학교에서
충정로 집으로 가는 길
국회의사당 앞 데모대를 만났다
 
아카데미극장 부근
가방 놓고 데모대에 박수쳤다
 
경찰이 욕을 퍼부었다
그래도 박수쳤다
경찰이 쏘아버렸다
 
사람들이 수도의대병원으로 실어갔다
오후 다섯시 사망
 
이 녀석아 이 녀석아 이 녀석아
(‘전한승’, 22권)
 
마지막 행에서 “이 녀석아”를 반복해 부르는 시인 혹은 화자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절절하다. 1907년에 개교한 수송국민학교는 세종로 가까이에 있었다. 시에서와 같이, 이 6학년 소년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국회의사당으로 가던 시위대를 만나 박수를 치다가 총을 맞고 쓰러졌다. 전한승 군의 사망으로 4월 26일 수송국민학교 어린이들은 세종로에 “국군아저씨들 부모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우리는 민주정의를 위해 싸운다”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본 연재의 15번째 글에서 4ㆍ19를 다룰 때 23권에 있는 같은 제목의 시 ‘전한승’을 소개한 바 있는데, 이러한 내용이 시로 형상화되어 있다). 이 어린이 시위대에게 길을 터주는 어른 시위대의 마음이 오죽했으랴. 고 전한승 군은 영정사진으로 친구들 옆에 앉아 함께 졸업식을 치르게 된다. 살아있다면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갈 그는 항상 어린 소년으로 국립4·19민주묘지 1묘역 195번에 누워 있다.
 
 
2016년 11월 12일 민중총궐기 시위에 엄마, 아빠 손을 붙잡고 나온 어린이들은 이 날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참으로 다행히 100만의 인파가 평화로운 촛불집회를 했으니 신나는 음악과 사람들의 함성 속에서 훗날 즐거운 기억으로 떠올리게 될까? 혹은 나쁜 일,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나라에 있어 엄마, 아빠를 따라 고치러 나갔다고 기억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아예 잊을 것인가? 늦은 밤까지 시위현장에 머물다 돌아가는 지하철역 안에 녹초가 되어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이들의 피곤한 모습을 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또한, 나이에 걸맞지 않은 비판과 분개의 목소리가 옆을 지나가는 어린이로부터 들리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이다. 시위를 마치고 아이가 탄 유모차를 힘겹게 들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는 엄마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그러하다.
 
4월혁명시의 시작
전한승 어린이가 다니던 수송국민학교의 한 다른 어린이가 4월혁명에 대한 시를 썼다. 이 소녀도 한승이를 잃은 수송국민학교 어린이들의 시위대 안에서 다른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구호를 외쳤으리라.
 
서울 수송국민학교 어린이
< … >
울밑에 선 봉선화
가장 좋아하는 어린이
그 어린이가 시를 썼다
 
아! 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오며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노을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노을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어린이 강명희 양이 이런 시 하나 써놓았다
모든 늙은이들이 울었다
4월혁명의 시는
이 어린이로부터 시작
이 어린이의 앳된 심장으로부터 시작 그러나
세상의 시들 4ㆍ19시들 거의 손장난이었다 피가 아니라 오줌이었다
(‘강명희’, 21권)
 
고은 시인의 이 신랄한 문단(文壇) 비판은 4ㆍ19로부터 멀리 있었던 시인과 문인들―자신도 포함하여―의 비겁함에 대한 질책과 반성이다. 그리하여 가장 정직하고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쓴 이 어린 소녀의 시가 4ㆍ19혁명의 참된 시이고, 희생이 끝난 뒤 겉멋 들린 심정을 토로하는 지식인들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2010년 완간 개정판과는 달리, 2006년에 간행된 <만인보> 21권의 초판에는 “정작 시인들의 시는 거의 손장난이었다 피가 아니라 오줌이었다”(2006년, 163쪽)로 되어 있어 직접적으로 “시인들”을 언급하고 있다. 시인의 이런 심정은 다음의 시에서도 엿보인다. “전쟁이 나면 / 가장 먼저 튀는 놈들은 지식인이다 / 혁명이 나면 / 가장 먼저 사라지는 놈들은 지식인이다 // 그뒤 혁명의 거리에 / 가장 먼저 나타나는 놈들은 지식인이다 / 무지렁이들 / 일자무식 머저리들의 주검 널린 그 거리 // 놈들은 혁명을 찬양하고 혁명의 논리를 만들어낸다 / < … >”(‘저무는 충무로’, 22권).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승이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또래 친구 두철이가 있다.
 
석간신문 판매원 두철이
열두살
 
그 화경눈 아이가 외쳤다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
구식 셔먼탱크와
셔먼탱크 주위
계엄군 병사에 외쳤다
신문다발
한 팔로 안은 채
 
쏠 테면 쏴보시오
당신들도 우리와 똑같은 대한민국 국민이오
내 친구가 19일
총 맞아 죽었소
쏠테면 쏘시오
 
그 소리 듣고
15사단 무장병사들 모두 다 총구멍을 내렸다
 
시민들
학생들 박수쳤다
두철이를 위해
박수쳤다
계엄군 병사들을 위해
박수쳤다
 
< … >
(김두철‘, 21권)
 
지난 토요일, 교복을 입고 거리 시위에 나온 우리의 아이들을 보며 또다시 세월호의 아이들을 생각하게 된다. 상주에서, 제주에서, 전국 곳곳에서 멀리 서울까지 올라와 거리에서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평범한 국민들을 보면서 국민들의 힘을 믿고 감동하게 되지만, 이런 감동을 국민들이 거리에서 만들어내지 않아도 인간의 존엄과 행복 추구권을 비롯한 국민의 모든 기본권이 제대로 보호받는 나라에서 살고 싶은 것이 국민들의 마음 아닐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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