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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연

(시론)죽 쒀서 '윤핵관' 줬습니다!

2023-01-31 06:00

조회수 : 2,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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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젊은 시절부터 '진보'였습니다. 대통령을 국민이 선출조차 할 수 없던 암흑의 시절, 세상을 뒤집어엎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보의 이념을 믿고 그 길을 갔습니다. 보수는 나쁜 것이라 생각했고 보수 정당 후보를 찍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거 때면 민주당을 찍는 유권자로 살았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났습니다. 나이가 들 만큼 들었고, 세상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갖고 있던 생각들이 많이 바뀌더군요. 두 가지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우선 민주당에서 마음이 떠나게 되었습니다. 문재인정부 5년의 시간 동안 진영 편가르기와 내로남불의 정치, 그리고 팬덤정치를 등에 업고 극단주의로 치닫는 민주당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난 시절 제가 믿었던 민주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수십년 만에 비로소 헤어질 결심을 했습니다. 더 근본적인 것은 보수냐 진보냐 하는 이념의 덧없음을 깨닫게 된 일입니다. "이기든 지든 별 차이가 없단다"(도로시 파커 '베테랑')는 시구절을 되뇌며 진보가 이기든 보수가 이기든 달라지지 않는 세상을 물끄러미 지켜봤습니다. 진보는 더 이상 도덕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았습니다. 진보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무능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상식을 존중하며 능력을 가졌는가를 가려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진보든 보수든 혹은 중도든, 국민의 지지를 더 많이 받는 정당이 정권을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해 대선에서는 보수정당인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국민의 지지를 더 받아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던 날 성공하기를 기원했듯이, 윤석열정부도 정말 잘해주기를 기원했습니다. 단지 민주당 정부가 보수 정부로 교체된 것을 넘어,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보수가 우리 정치를 변화시켜주기를 기대했습니다. 
 
이제 해가 바뀌었습니다만, 기대보다 실망이 더 많아지는 과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윤석열정부가 과거 실패했던 이명박-박근혜정부와 무엇이 다른지 알기 어렵게 되더군요. 대통령 이름만 빼고는 정책도 사람도 그대로입니다. 문재인정부가 들어선 직후 문 대통령은 봉하마을에 가서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우리는 이명박·박근혜 정부뿐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부까지, 지난 20년 전체를 성찰하며 성공의 길로 나아갈 것이다." 물론 빈말로 끝나기는 했지만, 말이라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윤석열정부에서는 지난 보수 정부의 시기를 성찰하겠다는 말조차 한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빈말이 되어도 좋으니, 말이라도 한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철학도 비전도 보이지 않는 보수 정부라는 문제의 바탕에는,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정치적 불감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마침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이 새 당대표를 선출하는 전당대회에 돌입합니다. 그런데 희망을 보여줘야 할 시간에 큰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친윤 대 비윤'의 프레임에 갇힌 여당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윤석열정부가 무엇을 해야 할지, 국민의힘은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고 '친윤이냐 아니냐'를 다투는 얘기만 무성합니다. '친윤'이 아니면 출마를 못 하게 봉쇄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말폭격을 하며 겁을 주는 광경이 벌어집니다. 아무리 유승민이 자기 멋대로이고 나경원이 이기적이어도 인위적으로 출마를 막을 권한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그런데 '친윤'의 이름으로 백주에 그런 일을 하는, 정당민주주의의 기본을 무너뜨리는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윤심'이 허락해야 출마하고, 불허하면 출마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 대단한 '친윤'의 중심이 누구인가 했더니 과거 시대에나 통했을 '윤핵관'들입니다. 애당초 새로운 5년을 선봉에서 이끌어갈 자격과 능력을 윤핵관들이 갖고 있다는 얘기를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대통령과 가까운 인연이 전부라고들 수군덕거립니다. 국민의 정권교체 여망에 따라 들어선 정부인데 어떻게 '그때 그 사람'들이 주인공이 된 것인지 영문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 정치인들이 새로운 정부의 주역이 되리라고 상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대다수의 국민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정권교체를 했더니 '죽 쒀서 윤핵관 준' 꼴이 되었습니다. 
 
새로움을 추구하며 조금만 잘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민주당에서 마음이 떠난 많은 중도층들이 마음을 주었을 겁니다. 하지만 집권세력 스스로 그것을 막아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민주당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런 보수 또한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입니다. 이쪽도 저쪽도 신뢰할 수 없기에 갈 곳을 찾지 못해 배회하는 민심이 여전히 많습니다. 민주당이 '이재명의 덫'에 갇힌 덕분에 잠시 지지율이 올랐다고 좋아하다가는 내년 총선에서 큰코다칩니다. 정치사의 교훈입니다.
 
유창선 시사평론가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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