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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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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1부장 이승형입니다
(이승형의 세상만사)숙희와 여가부 폐지

2022-03-2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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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육남매'는 60년대 초중반 지지리도 못 살던 서울 문래동 서민들의 애환을 가감없이 그렸다.
흑백 TV도 보기 힘든 시절이었다. 쌀밥 먹는 게 소원이었던 아이들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어른들이 부대끼던 골목길은 그 자체로 살풍경이었다. 육남매의 단칸방은 비만 오면 물이 뚝뚝 떨어지고, 연탄가스가 새어 나왔다. 어머니는 여름에는 냉차를 팔고, 겨울에는 떡을 팔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자식들 제때 먹이기도 벅찼다. 그러니 육남매는 철이 들기도 전 생계 전선에 나서야 했다. 신문배달을 하고, 봉투를 붙이고, 군고구마를 팔았다. 현 시점으로 보자면 아동 학대로 생각할 만큼 아이들 모두가 처절한 유년시절을 겪는다.
그 중에서도 둘째이자 맏딸인 숙희의 사연은 더 눈물겹다. 공부를 좋아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숙희였다. 하지만 오빠와 동생들의 학업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한다. 열 네살 나이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가발공장에 들어가 밤낮으로 일을 한다. 숙희는 수천년 묵은 '남아선호사상'의 제물이었다. 그 시절, 우리의 누이들은 숙희처럼 그렇게 가난을 책임졌다. 남자 아이에게 집안의 자원을 몰아주던 시절, 그것은 명백한 희생이었다. 
진보당 6·1 지방선거 기초의원 예비 후보와 당원들이 25일 대통령 당선인 집무실이 있는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 앞에서 당선인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 폐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반세기가 흐른 지금 세상은 천지개벽을 했다. 아들 좋아하던 시절은 오래전에 지났고, 남학생들이 전국 수석을 독차지했던 시절 또한 오래전에 끝났다. 여학생의 수능 성적이 남학생을 뛰어넘은지도 오래 됐다. '숙희의 희생'은 이제 없기 때문이다. 한 집안의 자원은 자녀들에게 거의 동등하게 배분된다. 최소한 교육에서만큼은 장남이라고 해서, 막내딸이라고 해서 특혜를 주거나 차별을 두는 부모는 거의 없다. 부모의 소득 격차에 따라 사교육에 의한 불평등은 있을지언정 성별의 차이로 인한 불평등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자 한편에서는 우리 사회 젠더 갈등이 대선의 화두가 될 정도로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대남', '이대녀'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2030세대 남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5060세대 누구도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정치권에서는 오히려 싸움을 부추겼고, 야당은 급기야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공약마저 내놓았다. 젠더 문제의 정치도구화가 현실화한 것이다. 갈라치기 공약은 일자리와 주거 불안에 몰린 청년들의 분노와 혐오 심리를 부추겼다.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긴다"는 젊은 남성들의 상상을 자극했다. 그리고 통했다. 가뜩이나 치고 받던 젊은 남녀들은 이번 대선을 통해 더 멀어졌다. 대선 이후 여론조사는 이를 입증한다. 현재 2030세대의 성별 정당지지도는 확연히 다르다. 이들은 앞으로도 편을 갈라 더 치열하게 싸울 것이다. 절망적이다.
하지만 여가부는 끝내 폐지될 전망이다. 한발 더 나아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여성할당제, 청년할당제, 장애인할당제를 모두 없애겠다"고 공언했다. 공정을 이유로 내세웠다. 그런데 과연 여가부를 폐지한다고, 공정이 이뤄질까. 공정이 대체 무엇이길래. 언젠가부터 우리는 태어나면서 결정된 것들, 즉 부모의 소득, 사는 지역 등이 마치 능력인 것처럼 포장되는 사회를 살고 있다. '스펙의 시대'다. 개천에서 용나던 시대는 끝났다. '질좋은 사교육에 의한 부의 대물림'은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앞으로도 더욱 부추길 것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우리 사회 '엘리트'라는 자들은 이 모든 게 공정하게 경쟁한 결과물이니 괜찮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 주장을 널리 퍼뜨리고 있다. 누구나 강남에 살고, 대치동 학원을 다니고, 명문대를 가고, 미국 유학을 다녀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무한경쟁시대에 인생의 출발선 자체가 차이나는데 이를 공정이라 하다니 이처럼 불공정한 말도 없다. 젠더 갈등 부추기는 것도 모자라 양극화마저 그럴 셈인가.
세계경제포럼(WEF)의 2021년 세계성별격차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은 성격차 지수 156개국 중 102위였다. 성별임금격차는 31.5%로 OECD 국가 중 가장 크다. 가정에서의 불평등이 사라졌다해서 그것이 곧 사회적 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정의 변화를 국가가, 사회가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다. 
60년이 지났어도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많은 숙희들이 있다. 새 정부는 이 점을 직시해야 한다. 진정 국민통합을 원한다면 여가부 폐지 공약은 폐지해야 한다. 
뉴스토마토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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