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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국가과학기술연구회를 해체하자

2021-05-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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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계가 시끄럽다. 최초의 여성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후보자 임명 여부 때문이다. 야당은 모두 임혜숙 후보자의 임명을 반대한다. 특히 정의당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4주년 특별연설에서 임혜숙 장관후보자를 ‘성공한 여성과학자의 롤모델’로 감싼 것과 관련, “결격 사유가 분명한 장관 후보자 임명을 강행하는 것은 공정·균형의 원칙에 서있는 여성 할당제도의 정신을 희화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임명강행의지는 명백하다.
 
과학계는 혼란스럽다. 공공연구조노의 설문조사 결과 52%가 장관임명을 반대했고, 찬성은 채 20%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과총은 입장문을 통해 “과기정통부 최초 여성 장관 지명을 환영한다”고 강력한 지지의사를 밝혔고, 과총, 한림원 등의 과학기술계 원로연합은 이공계 논문표절에 대한 명백한 왜곡에 대해 임 후보자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임 후보자의 다운계약서 작성, 위장전입, 자녀 동반 외유성 출장 등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 이래, 과학기술계는 서울대 출신의 남성 과학기술인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래서 최초의 여성 과기정통부 장관이 탄생하는건 좋은 일이다. 존 롤스가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통해 주장했듯이, 규칙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할 수조차 없는 최소수혜자에게 최대한의 혜택이 돌아갈 때에만, 체제는 공정함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산부나 노약자 배려석을 마련하는 것처럼, 여성과학기술인에게 장관직을 우선적으로 배정하는 것 역시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 된다. 인문학 정부에서, 남성 중심의 과학기술계에 여성할당제를 과감히 도입한 점은 박수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공정함에 치우친 그 인사가 초래한 참극은 또 다른 얘기다.
 
임혜숙 후보자가 불과 3개월만에 미련 없이 사퇴한 NST는, 1999년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설립된 법인으로, 제18조에 의하면 과기정통부장관이 과학기술분야 25개 정출연을 지원 및 육성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설립하는 조직이다. 제19조는 “인사·예산·평가·사업관리 등에 있어 연구기관 공통의 애로 사항을 조사하고 이의 해결을 위하여 연구기관이 상호 협력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로, 연구회의 책무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 진흥의 임무를 띄고 화려하게 탄생한 NST는, 과학기술계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는 조직으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과학기술인은, NST가 도대체 뭘하는 곳인지 알지 못한다.
 
NST는 막스플랑크 연구회, 프라운호퍼 연구회처럼 정부로부터 독립해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독일식 공공연구개발 체제를 수입해 만든 조직이다. 하지만 독일에서 직수입한 시스템은 우리의 현실과 잘 맞지 않았다. 최초에 국무총리실 산하로 기초기술연구회, 공공기술연구회, 산업기술연구회로 세분화되었던 조직이 5년도 되지않아 과기부 산하로 이관되었고,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함께 공공기술연구회는 공준분해되었다. 이후 산업기술연구회는 지식경제부로 이관되었다가, 박근혜 정부에서 다시 미래부 산하기관이 되지만, 2014년 기초/산업 두 연구회를 하나로 합쳐 현재의 NST가 만들어졌다. 즉, 누군가 독일의 훌륭한 제도랍시고 한국적 맥락을 무시하고 수입한  연구회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한국 과학기술생태계의 골치거리라는 뜻이다. 
 
임혜숙 후보자가 NST 이사장이 되기 전에도, 이미 NST 이사장은 몇 개월간 공석이었다. 이제 임혜숙 후보자가 사퇴했으니, 다시 몇 개월간 이사장 자리는 공석일 것이다. 문제는 NST 이사장이 몇 년간 공석이어도 한국 과학기술계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임혜숙 후보자는 그 점을 잘 알고 존재감 없는 이사장 자리를 그만두었을 것이다. 정출연의 원장들은 NST 이사장이 아니라 과기정통부 하급 관료들을 더 무서워한다는 농담이 있다. 즉 NST를 패스해도 정출연엔 아무런 피해가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정출연의 작동원리를 전혀 알 리가 없는 임혜숙 후보자 같은 대학교수 출신들이 정권의 낙하산으로 이사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아무 문제가 될리 없다. NST가 없어도 한국 과학기술계엔 아무 문제가 없다.  
 
임혜숙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에서 한국 과학기술계가 반성해야 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여성이라고 감싸주고, 이공계 논문의 표절 여부에 발끈하기 전에, 한국 과학기술계 원로들은 당장 사라져도 아무 문제 없을 NST라는 조직이, 1년에 1천억원이 넘는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어야 한다. 나아가 NST처럼 불필요한 기관 덕분에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이 정체되고 있음에 슬퍼해야 했다. 과총, 여성과총, 한림원의 원로들이 과학기술과 국가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면, 당장 NST를 해체하라는 성명서를 냈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정권에 충성하는 것만 생각하는 과학기술계 원로들이, 한국의 과학기술을 망치고 있다. 검찰은 민주화되었는지 몰라도, 이 땅의 과학기술은 다시 정치에 종속되었다. 인문학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은 철저히 실패했다. 슬픈 일이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heterosis.kim@gmail.com)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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