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메모리 제조사들이 만든 고대역폭메모리(HBM)는 대만 TSMC로 간다. TSMC는 먼저 제작해둔 그래픽처리장치(GPU) 다이에 한국산 HBM을 패키징한다. 이렇게 완성된 제품은 다시 미국으로 향한다. SK하이닉스-TSMC-엔비디아 삼각동맹의 프로세스다. 한국과 대만, 미국을 거쳐 GPU 하나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지난해 11월 미국 워싱턴 DC의 존 F. 케네디 공연예술센터에서 열린 미국-사우디 투자 포럼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처럼 현대 AI 가속기 시장은 메모리와 팹리스(설계), 파운드리(위탁생산)의 분업 구조를 기반으로 움직인다. 각자 잘하는 분야에 집중하는 건데, 그만큼 병목현상이 발생하기도 쉽다. 세 축 가운데 한 곳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전체 공급망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외신에 따르면 최근 엔비디아는 AI 가속기 ‘루빈’의 생산 목표를 25% 줄였는데, 이는 메모리 공급 부족이 원인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긴다. 모든 공정을 한 기업이 맡아 일원화하면 물류 이동과 병목을 줄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로 메모리와 시스템LSI, 파운드리를 모두 갖춘 삼성전자가 이 원스톱 솔루션을 지향하고 있다.
그럼에도 3사가 업무를 나누는 이유는 높은 기술적 난도와 비용 때문이다. 공장은커녕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하나에도 5000억원이 드는 시대다. 막대한 자본이 드는 데다, 고도화된 반도체 산업에서 전문 인력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다. 쉽게 말해 한 분야에 집중하기도 벅차단 뜻이다.
이런 가운데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업계의 상식’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테라팹. 로직과 메모리, 패키징을 한 지붕 아래에서 일원화하겠다는 것이다. 세부적인 규모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업계에서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 생산 시설인 대만 TSMC에 준하는 규모로 만들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비용과 기술력 등 우려는 분명하지만, 머스크는 여전히 테라팹 준비를 이어가고 있다. 미 대표 반도체 기업인 인텔과 협업하면서 기술적 노하우도 확보했다. 근본적으로 인텔이 삼성전자와 같은 종합반도체 기업(IDM)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협력 범위가 확대될 여지도 있다.
머스크의 실험은 반도체 업계, 특히 국내 기업들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테라팹 구상이 안착할 경우, 다른 빅테크 기업들도 테슬라처럼 반도체 산업 생태계 전반을 내재화하려 할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의 철저한 분업 구조가 이어질지, 통합으로 재편될지가 테라팹 성패에 달린 것이다.
안정훈 기자 ajh76063111@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