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뉴스토마토 동지훈 기자] 권한이 클수록 책임도 커지는 건 우주를 망라하는 법칙입니다. 개인이 됐든 단체가 됐든 마찬가지입니다. 고도의 전문성이 필수적인 위치일수록 권한과 책임의 크기는 비례합니다.
의사라는 직업은 생명의 출발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관여할 수 있는 특수한 직종입니다. 사소한 판단과 결정 하나로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만큼 권한을 행사할 때 져야 할 책임도 가볍지 않습니다. 어느 문화권에서든 의사가 나름의 대우를 받는 건 큰 책임감을 안고 있다는 데 대한 일종의 배려 덕분일 겁니다.
최근 의사단체의 움직임을 보면 권한과 책임을 같은 저울에 두지 않는 듯합니다. 공동체의 건강 수호보다는 직역의 권한 지키기에 급급한 모양샙니다. 의료계 유일 법정 단체인 대한의사협회가 성분명 처방에 반대하는 움직임에서 특히 직역 이기주의가 드러납니다.
성분명 처방은 특정 의약품의 상표 대신 성분을 기준으로 처방토록 하는 제도입니다. 의사가 처방전에 상품명 대신 성분을 기재하면 약사가 해당 성분의 의약품을 선택하는 방식입니다. 제약사의 리베이트를 근절하면서 의약품 품절 사태로 인한 혼란을 막을 수 있는 대안 중 하나입니다.
국회에선 수급불안정 의약품에 한해 성분명 처방을 시행토록 하는 법안이 준비됐으나 외부 변수에 가로막혀 다음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는 사이 의협은 해당 법안이 '생명을 건 도박'이라고 평가절하하고 나섰습니다. 같은 성분의 의약품이라도 약물학·약동학적 특성이 다르고 임상 환경에서 환자 개인 차가 있다는 근거를 붙이긴 했지만, 합리적 비판이라기보다 원색적인 비난에 가깝습니다.
의협의 성분명 처방 반대 움직임은 외부 환경 변화로 인한 입지 축소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비교적 최근까지만 해도 다방면에 걸쳐 강력하게 구축됐던 의사들의 권한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옅어지고 느슨해졌습니다. 문신사법 시행으로 인한 변화가 대표적입니다. 문신사법 시행 전까지 합법적 시술이 가능한 이는 의사뿐이었습니다.
의대 정원을 늘리려던 지난 정부의 정책 추진은 의협의 불만에 기름을 들이부은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합의점 도출 가능성이 커졌지만, 의대 정원 문제는 의협이 역린으로 간주할 정도로 민감한 문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분명 처방이 단계적으로 시행된다면 의사들이 천부인권처럼 믿는 '처방권'이 점차 힘을 잃게 됩니다.
오랜 세월 구축한 영향력을 한순간에 잃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은 성분명 처방을 저지하려는 심리적 배경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평생을 엘리트로 살아왔던 이들 특유의 고집까지 더해지면 명분은 더 강화된다고 믿기 십상이겠죠.
명분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절대적인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의사들 스스로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명분보다는 객관적인 근거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의사들이 모인 단체라면 개인을 넘어 공동체, 국가의 보건 수준을 끌어올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남들보다 오래 공부하고 힘들게 수련하는 것도 그만큼 맡은 일의 무게감이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큰 권한을 가졌을수록 책임의 무게가 달라진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책임 없는 권한은 이기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지훈 기자 jeeho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