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동맹국에 파병을 요청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다 필요 없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촌극을 벌이고 있다. 외교적 설득이 좌절되자 곧장 감정이 앞서는 장면은 최고 권력자에게서 종종 목격되는 공감의 결핍과 분노의 즉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트럼프의 ‘안하무인’ 행보는 해프닝이 아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전개돼 온 그의 외교 방식이 일관되게 드러난 결과일 뿐이다. 다국적 연합을 주도하겠다고 나섰다가도, 우방국들이 각자의 이해관계로 신중한 태도를 보이면 곧장 실망과 조롱을 쏟아낸다. 필요할 때는 손을 내밀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판을 엎는 방식이다. 이는 오랜 기간 부동산 사업가로서 권력과 자본을 통해 관계를 주도해온 그의 삶의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타인과 타협하거나 공감하기보다 무조건 우위를 점하고 통제하려는 ‘오만함’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낯설지 않은 장면이 겹쳐진다. 태평양 건너에서 반복되는 ‘감정의 정치학’은 불과 얼마 전 한국 사회가 겪었던 혼란을 떠올리게 한다. 평생 남을 압박하는 검사로 살며 명령과 통제에 익숙했던 윤석열 전 대통령 통치 방식 역시 협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끝내 아집을 버리지 못했고 갈등이 누적될수록 분노만 키웠다. 마침내 ‘비상계엄’이라는 극단적 무리수를 던져 헌정 질서를 뒤흔든 참사는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권력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증명한다.
여기서 극명하게 갈리는 대목은 ‘분노조절장애 리더’를 대하는 유권자의 선택이다. 한국 사회는 지도자의 변덕과 폭주를 묵인하지 않았다. 국가 시스템이 권력자 개인의 감정 풀이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을 목격한 시민들은 즉각 거리로 나섰고, 매서운 탄핵의 철퇴를 내려 헌정 질서를 바로잡았다.
미국의 대처는 사뭇 달랐다. 트럼프의 거친 언사와 즉흥적 결정, 뜬금없는 짜증은 이미 온 세계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미국 유권자들은 그에게 다시 한 번 백악관 열쇠를 쥐어 주었다. 끝 모를 인내심인지 지독한 안목 부재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스스로 자초한 오판의 청구서는 미국 유권자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점이다.
오만한 권력자에게 면죄부를 준 대가는 당장 불붙은 중동의 화약고에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란과 무력 충돌 긴장감이 고조되는 벼랑 끝 상황이지만, 동맹국들은 더 이상 변덕스러운 리더의 ‘감정 놀음’에 자국의 청년들을 피 흘리게 할 명분이 없다. 굳건했던 혈맹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고립을 자초한 것은 다름 아닌 미국 자신이다. 그러니 아쉬울 때만 들이미는 파병 청구서는 이제 거두는 것이 맞다. 강한 언사와 즉흥적 결단을 ‘리더십’으로 착각해 기어이 그를 다시 최고 권력의 자리에 앉혔다면, 그가 벌여놓은 전쟁의 짐과 피의 대가 역시 온전히 미국 혼자 감당해야 마땅하다.
윤영혜 기자 yy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