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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증금 채권 몰래 양도한 임차인…대법 "보증금 받아써도 횡령죄 안돼"
"임차인은 자기 돈 받아 쓴 것…채권 양도 의무는 민사상 책임"
"보증금은 채권양수인 소유"로 본 대법 판례 23년만에 변경
2022-06-23 19:39:16 2022-06-23 19:39:16
 
[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 임자보증금반환채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 임차인이 이를 모르고 있는 임대인으로부터 보증금을 반환 받아 사용했더라도 횡령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임차인이 다른 사람의 재물을 보관하고 있는 사람의 지위를 갖고 있다고 봐 횡령죄를 인정한 대법원의 판례를 23년만에 변경한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23일 횡령혐의로 기소된 A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벌금 3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인천지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같은 사례에서 횡령죄의 유죄를 인정한 종전 대법원 판결은 이로써 모두 변경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3일 대법원 대법정에서 판결을 선고하고 있다. 사진=대법원
 
이번 사건의 쟁점은 임차인(채권양도인)이 보증금반환채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 사실을 임대인(채무자)에게 알리지 않고 보증금을 반환받아 사용한 경우, 임차인이 보증금반환채권을 넘겨받은 사람(채권양수인)과의 관계에서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보관자의 지위'를 갖는지 여부였다.
 
종전 대법원은 원칙적으로 임차인이 보증금반환채권을 넘겨받은 사람을 위해서 보증금을 수령한 것으로 판단해 보증금 소유자를 채권양수인이라고 봤다. 이 때문에 종전 판례를 그대로 적용하면 A씨의 횡령혐의는 유죄가 된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 사건에서 채권양도인과 채권양수인 사이에 어떠한 위탁관계가 설정된 적이 없다"면서 "횡령죄에서 재물의 타인성과 관련해 대법원 판례가 유지해 온 형법상 금전 소유권 개념에 관한 법리에 비춰 보더라도, 채권양도인이 대항요건(채무자에 대한 통지)을 갖춰 주기 전 추심해 수령한 금전 소유권은 채권양도인에게 귀속할 뿐이고 채권양수인에게 귀속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또 "채권양도의 대항요건을 갖추기 전 채권양도인과 채무자, 채권양수인 세 당사자의 법률관계와 의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더라도 채권양도인이 채무자로부터 채권양수인을 위해 '대신 금전을 수령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A씨는 자신이 소유권을 취득할 의사로 보증금을 반환받은 것일 뿐이고 임대인도 자신의 채권자인 A씨에게 보증금을 갚은 것이지 임차보증금반환채권 양수인에게 보증금을 지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어 "그밖에 다른 원인으로 채권양도인이 수령한 금전 소유권이 수령과 동시에 채권양수인의 소유로 되었다고 볼 수 있는 법률적 근거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이와 함께 "채권양도인과 채권양수인은 통상의 계약에 따른 이익대립관계에 있을 뿐 횡령죄의 보관자 지위를 인정할 수 있는 신임관계에 있다고 할 수 없다"면서 "채권양도인이 채권양수인에게 대항요건을 갖춰주는 등 채권양도와 관련해 부담하는 의무는 일반적인 권리이전계약에 따른 양수인에 대한 급부의무(민사상 채무)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결국 채권양도인이 양도통지 등 대항요건을 갖추는 행위를 하는 것은 자기의무를 이행하는 것에 불과하고, 이를 채권양수인의 사무를 대행하는 것으로는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A씨는 경북 안동에 있는 한 건물 1층을 보증금 2000만원, 월세 100만원에 임차해 식당을 운영하던 중 2013년 부동산중개업자를 통해 B씨 소유 임야와 자신의 식당 임차보증금을 교환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A씨는 이 사실을 임대인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B씨 소유 임야 시세가 생각보다 낮자 A씨는 이듬해 3월 임대인으로부터 월세 연체분을 뺀 임차보증금 1146만원을 반환받아 써버렸다. B씨는 A씨를 횡령죄로 고소했다.
 
1심은 채권양도인이 채권양도의 대항요건을 갖춰 주기 전 채무자로부터 채권을 받아낸 돈을 임의로 처분한 경우 채권양수인에 대한 횡령죄를 인정한 종전 대법원 판례에 따라 A씨의 유죄를 인정하고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A씨는 B씨에게 식당 임차보증금을 양도하기로 한 사실이 없다며 항소했으나 항소심 역시 1심을 유지했다. 이에 A씨가 상고했다.
 
대법원은 "통상의 계약관계에서 타인의 재산을 보호·관리하는 것이 계약의 전형적·본질적 내용이 아니라면, 계약의 불이행을 형사법상 범죄로 확대해석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이 최근 횡령·배임죄에 대한 대법원 판례 경향이고, 이번 판결 역시 이를 반영한 것"이라면서 "채권양도 영역에서도 횡령죄의 구성요건인 '재물의 타인성'과 '보관자 지위'를 엄격하게 판단해 죄형법정주의를 엄격하게 적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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