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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비종교적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 첫 인정(종합)
'비폭력·반전주의 퀴어 페미니스트' 병역거부 무죄 확정
"비종교적 신념도 병역법상 인정한 '정당한 사유' 해당"
"병역의무 일률적 강제·형사처벌은 양심의 자유 침해"
"소수자 관용·포용이라는 자유민주주의 정신에도 위배"
2021-06-24 14:01:33 2021-06-24 23:36:19
 
[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 비폭력·반전주의 등 비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한 병역의무 거부도 인정해야 한다는 첫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종교적 신념상 병역의무를 거부한 것을 무죄로 본 대법원 판결은 이미 나왔지만 비폭력·반전주의 등 비종교적 신념도 병역법상 병역의무를 거부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로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규적 '병역의무' 거부에 대한 이번 판결은 지난 2월 대법원이 비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예비군 훈련'을 거부한 사람에 대해 무죄 선고를 확정한 사안과는 또 다른 것이다. 
 
군인권센터,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 전쟁없는세상, 참여연대 회원들이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법원 무죄 선고 이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24일 병역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번 사건의 쟁점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아닌 사람이 비폭력·반전주의 신념과 신앙을 이유로 현역병 입영을 거부하는 경우 병역법 88조 1항에서 정한 '정당한 사유'가 인정되는지 여부였다. 이 조항은 '정당한 사유' 없이 병역의무 거부자를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른바 양심적 병역거부는 종교·윤리·도덕·철학적 또는 이와 유사한 동기에서 형성된 양심상 결정을 이유로 집총이나 군사훈련을 수반하는 병역의무의 이행을 거부하는 행위를 말한다"고 전제했다.
 
"헌법상 기본권 보장체계 위반"
 
재판부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병역의무의 이행을 일률적으로 강제하고 그 불이행에 대해 형사처벌 등 제재를 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비롯한 헌법상 기본권 보장체계와 전체 법질서에 비추어 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라는 자유민주주의 정신에도 위배된다"면서 "같은 취지로 판단한 원심은 옳다"고 판시했다.
 
이어 "따라서 진정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면, 이는 병역법 88조 1항의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고, 이때 진정한 양심이란 그 신념이 깊고 확고하며 진실한 것을 말한다"면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양심을 직접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물의 성질상 양심과 관련성이 있는 간접사실 또는 정황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재판부의 이같은 판시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오승헌씨의 병역거부에 대해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무죄를 선고한 판결 내용과 같다.
 
군인권센터,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 전쟁없는세상, 참여연대 회원들이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법원 무죄 선고 이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법원에 따르면, A씨는 2017년 11월14일까지 육군 모 사단에 입영하라는 서울지방병무청장 명의의 현역 입영통지서를 전달 받고도 이에 응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다. A씨는 재판 과정에서 "사랑과 평화를 강조하는 기독교 신앙과 소수자를 존중하는 페미니즘의 연장선상에서 비폭력주의와 반전주의를 옹호하게 됐고 그에 따라 병역의무의 이행을 거부한다"고 항변했다. 대한성공회 교인이지만 신앙 외에 소수자에 대한 신념과 페미니즘과 그로 인한 비폭력·반전주의 신념을 병역법상 '정당한 사유'라고 주장한 것이다.
 
1심은 징역 '1년 6월', 2심은 '무죄' 
 
1심은 2018년 2월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과 대법원 판결의 취지에 비춰 보면, 피고인이 종교적 양심 내지 정치적 신념에 따라 현역병 입영을 거부하는 것이 병역법 88조 1항의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A씨가 항소했다.
 
항소심은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의 성장과정과 활동 사항에 주목했다. A씨는 고교 재학시절부터 획일적 입시교육과 남성성을 강요하는 또래집단 문화에 성소수자로서 반감을 느끼며 사회의 기존가치에 의문을 품게 됐다. 이 과정에서 정의와 사랑을 가르치는 기독교 신앙에 의지했다.
 
대학 입학후에는 사회참여적 선교단체 가입해 △이스라엘 무력침공 반대·팔레스타인 평화염원 기도회 △용산참사문제 1인 시위 △한국전쟁 60주년 평화기도회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운동 등 비폭력·반전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또 이 시기성소수자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스스로를 '퀴어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했다. A씨 주장에 따르면 '퀴어 페미니스트'란 사회가 정상 및 표준으로 여기는 요소를 성소수자의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탐구하는 사람이다.
 
군인권센터,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 전쟁없는세상, 참여연대 회원들이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법원 무죄 선고 이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A씨, 대학 때부터 비폭력·반전 운동
 
A씨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신념을 발표한 논문과 기사, 발표문, 번역문, 강의자료 등 자료 45건을 제출했다. '병역거부자 교육상담' 프로그램이나 모임 참석, 수감 중인 병역거부자 면회 사항 등을 증빙할 수 있는 자료 31건도 아울러 제출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사랑과 평화를 강조하는 기독교 신앙과 소수자를 존중하는 페미니즘의 연장선상에서 비폭력주의와 반전주의를 옹호하게 됐고 그에 따라 병역의무의 이행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피고인의 신앙과 신념이 피고인의 내면 깊이 자리 잡혀 분명한 실체를 이루고 있어 피고인이 진정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돼 병역법 88조 1항의 '정당한 사유'가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이어 "피고인의 지인들이 작성·제출한 사실확인서에 의하면 피고인은 적어도 2010년부터 주변에 병역거부 의사를 표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중고교 생활기록부 등을 보더라도 피고인에게 폭력적인 성향을 인정할 수 있거나 자신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양심을 의심하거나 부정하게 할만한 특별한 사정 역시 발견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성장과정·사회경험 토대로 진정성 판단"
 
재판부는 이와 함께 "병역을 거부하는 피고인의 신념이 기독교인으로서의 일반적 신앙과 '퀴어 페미니즘'의 신념에 뿌리를 둔 이상 피고인의 성장과정과 학교생활, 사회경험 등 전반적인 삶의 모습이 피고인의 신념이 깊고 확실하며 진실한지 판단하는데 중요한 정황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A씨가 얼마나 기독교의 교리 일반을 숙지하고 철저히 따랐는지 △기독교 신앙을 신봉하게 된 동기와 경위 △신앙기간과 실제 종교적 활동 △A씨의 삶에서 '퀴어 페미니즘'의 신념이 얼마나 발현되었고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 등을 병역법상 기피사항인 '정당한 사유'를 판단하는 근거로 제시했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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